지난해 세월호 유가족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46일 단식 기간 중 옆자리를 끝까지 지킨 한 사진작가가 있다. 그가 찍은 김씨의 앙상한 다리와 핼쑥해진 얼굴 사진은 SNS상에서 한동안 회자됐다. 지난 1년을 세월호에 전념했던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준수씨다. 

박씨는 세월호 사진을 통해 지난달 국제사진상(International Photography Awards) 포토에세이 & 피쳐스토리 부문 장려상을 받았다. 이보다 앞선 지난 7월에는 파리사진상에서 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를 지난 4일 서울 명동에서 만났다.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준수씨의 작품 ⓒ박준수
 

박씨는 “기쁘다기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소감을 밝혔다. 그가 찍은 만여 장의 세월호 사진에는 유가족들의 삶과 표정이 잘 드러나 있다. 다른 기자들보다 더 가깝게, 유가족과 공감하며 신뢰를 쌓은 결과였다. 

김씨는 7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준수 작가는 단식을 했을 때 항상 옆에 있어줬다”며 “외국에 세월호를 알렸으니 유가족 입장에서는 너무나 고마운 분”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모든 것이 밝혀질 때까지 세월호 사진을 찍겠다고 장담할 수 없다”면서도 “관심을 꺼지게 하고 싶지 않다. 관심이 사그라진다면 스스로 납득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아래는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 언론과 인터뷰는 처음인가. 

“외국 매체나 단체와는 몇 번 했었다. 인터뷰를 꺼리는 편이다. 얼굴 없는 사진가가 좋다. 카메라 뒤에 숨어 있는 걸 좋아한다.(웃음) 우리가 하는 게 스토리텔링인데, 자신이 스토리텔러가 되려고 앞에 나서는 걸 지양한다. 하지만 세월호 가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영어권에서는 잘 모를 테니까 몇 번 인터뷰를 했다.”

- 세월호에 대한 외신의 관심이 궁금하다.

“사실 외신에서도 세월호는 뉴스 가치가 많이 낮아진 상태다. 타인의 고통은 오래 머물지 않잖나. 자연의 섭리 같은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더 그랬다. ‘세월호 피로감’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니까. 외신에 끈이 있는 편이니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 세월호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사고 당시 사진작가로서 진도에 내려갔던 것은 아니다. 미국 공영방송 NPR의 통역으로 내려갔다. 지금은 유가족이지만 당시는 실종자 가족이었다. 학생들이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과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뭔가 이뤄지는 일은 없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절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3~4일 목격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 어떤 사건을 말하나. 

“세월호 가족들이 KBS와 청와대를 항의 방문했다. 그때 아이들 사진을 처음 봤다. 배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아이들의 실체가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애들이 다 죽었다는 건가’라는 절망감이 북받쳤다. 참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날 밤을 새우고 다시 진도를 찾았다. 진도에서 느낀 것은 세월호 유족들과 그들의 슬픔이 계량화,  수치화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짜 사람 얘기를 해보자’는 결심이 섰던 까닭이다.”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준수씨의 작품 ⓒ박준수
 

- ‘유민아빠’ 김영오씨 사진이 화제였다. 앙상한 다리에 뼈만 남은 사진이다. 

“미디어오늘 기자 소개로 유민아빠와 인연이 생긴 것이다.(웃음) 지난해 단식 4일차 되던 날 처음 만났다. 인상이 너무 좋으셨다. 서글서글하시고. 그가 46일이나 단식할 줄 누가 알았겠나. 10일 정도 하시다가 그만하실 줄 알았다. 단식 이후의 삶을 찍을 생각이었다.”

- 곁에서 지켜보면서 들었던 바는 무엇인가. 

“몰입이었던 것 같다. 유민아빠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실체’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가족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싸웠던 것은 아니잖나. 국가적 재난이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정치 논쟁화했고, 사회운동으로 번졌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나. 정부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구조 작전 자체가 실패했다. 고위 공직자 가운데 책임진 사람은 없다. 유가족은 철저하게 희생됐다.”

- 세월호 사진을 찍으면서 적지 않은 부담도 느꼈을 것 같다. 

“세월호 사진만 올리다보니까 ‘너무 세월호만 하는 거 아니냐’, ‘왜 유가족 편만 드느냐’는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접근 방식은 하나다. 세월호 가족에 대한 공감과 진실에 대한 갈구다. ‘활동가냐, 기자냐’는 물음은 사안을 단편적으로 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민아빠는 언론의 공격을 당했다. 

“악의적으로 공격하는 부류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민아빠가 여론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집권 세력은 코너에 몰렸다. 그러자 천박한 방식으로 인신공격을 해댔다. 굉장히 비열했다. 유민아빠의 딸 유나양이 단식장을 몇 번 다녀갔다. 부녀간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 맹목적인 비난은 유민아빠 (다리) 사진 등을 올린 이유였다. 돈 때문에 단식한다는 비난도 많았는데, 묻고 싶다. 돈을 주면 40일 단식을 할 수 있는지.”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준수씨의 작품 ⓒ박준수
 

- 세월호 사진은 얼마나 찍었나. 세월호 이전과 이후 변화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연사(연속적으로 사진 찍는 것)를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만여 장 정도 있는 것 같다. 변화라고 하면 주변에서 세월호 이전과 이후 변화한 이들이 있다. 전업이든 취미든 예술하는 사람들 얘기다. 기타를 치던 사람들도, 그림 그리던 사람들도 세월호 이후 적잖이 그만두더라. 국가의 퇴행에 크게 실망한 것이다. ‘내가 이거 하면 뭐해’, ‘애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라는 자괴감, 나도 많이 느꼈던 감정이다.”

- 세월호 사진으로 해외에서 수상을 했다. 

“최근 국제사진가상(IPA)에서 포토에세이‧피처스토리 부문 장려상을 줬다. 이보다 앞서 지난 7월에도 파리사진상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 외신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수상 소감을 말해달라.(웃음)

“기쁘다기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세월호에 대한 외신의 관심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해외에 알리자는 취지로 지원했던 것이다. 이런 소식이 유가족 분들에게 힘이 될 수 있을 테니 참 다행이다. 여전히 난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명해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큰 상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불씨를 이어가자는 생각이다. 모든 것이 밝혀질 때까지 세월호 사진을 찍겠다고 장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관심을 꺼지게 하고 싶지 않다.”

- 외국 기자나 언론, 시민의 반응은 어떠한가?

“외국에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정부에서 당연히 조사하고 책임자 처벌한 줄 안다. ‘아직도 해결 안 됐어?’라고 반문하는 이들이 많다. 도리어 내 입장에서 세월호를 설명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니까.”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준수씨의 작품 ⓒ박준수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다. 기존 사진 저널리스트와는 어떻게 다른가. 

“뭐랄까. 관점이 더 들어간다고 해야 하나. 내가 찍는 사진은 한국 매체가 소화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굳이 말하면 ‘사진으로 말하는 논설위원’이랄까. (질문 : 한국의 ‘논설위원’은 꼰대 기질이 다분한 편인데.) 그런가?(웃음) 보통 한국에서 사진은 글 기사를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하잖나. 반면 다큐멘터리 작가를 에디토리얼리스트(Editorialist)라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작가의 관점과 주관이 많이 들어간다. 세월호도 그런 관점으로 찍었다.”

- 프리랜서다. 그리고 독일 LAIF 에이전시에서 소속돼 활동 중이다. 

“독일 에이전시와 일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독일의 장점은 저작권 보장이 잘돼 있다는 것이다. 사진작가들을 존중하기 때문에 사진도 단 1회 사용한다. 더 사용하고 싶으면 추가 구매를 하는 것이고. 결제도 30일 이내 이뤄진다. 반면 미국은 45일 정도 걸린다. 또 독일 사람들 성격이 직설적이라서 문제가 있다면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합리적이다.”

- 한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시장 구조 자체가 다르다. 외국의 경우 사진 전문 편집자가 존재한다. 사진만 전문적으로 보면서 레이아웃을 짠다. 사진가에 대한 존중이 기반에 깔려 있는 거다. 그래서 포토 에디터라는 말이 또 나오는 것이고. 국내 언론들도 그런 시도를 하는데 독립적인 사진가들과 작업을 한 경험이 없다. 자사 사진기자들도 있으니 아무래도 외국과는 큰 차이가 있다.”

- 사진을 찍은 때 어떤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하나. 

“소외된 사람과 장소다. 사진작가 최민식 선배에 감동을 많이 받아왔다. 그는 사람 냄새 나는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나도 인간미가 느껴지는 사진을 많이 찍고 싶었다.”

- 프리랜서 작가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 아닌가. 

“그렇지.(웃음) 밖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는 다르다. 2006년부터 통역 등 영어 관련한 일을 병행했다. 그러나 통역은 한 자리에 묶여 있어야만 한다. 그렇게 2~3년 엄청 고생했다. 어차피 사진 찍어서 재벌이 될 수는 없다.”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준수씨(사진=김도연 기자)
 

- 통역할 정도면 언어 능력이 뛰어난 것 아닌가. 

“캐나다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녔다. 물론 대학교는 중퇴했지만.(웃음) 락 음악을 통해 ‘체제 저항’이라는 걸 습득했달까.(웃음)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도 성적으로 줄 세우는 현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 체제 저항적 인사로 보이지는 않는데.(웃음)

“맞다. 나는 예나지금이나 리버럴(자유주의)이다. 캐나다에서는 중도 우파에 가까웠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좌파 사진가’가 됐다. 권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고 또 부당한 걸 부당하고 말하는 편인데…. 한국 자체가 보수적인 것이지. 캐나다에서는 촘스키 등을 자유롭게 공부했었는데, 여기서는 좌파로 몰리지 않나.”

- 향후 계획이 있나. 

“일단 세월호 작업을 더 해야 한다. 1주기 때만해도 전시를 한다든지, 책을 낸다든지 하는 것이 굉장히 부담됐다. 내가 사진작가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까봐서다. 그래도 조그마한 전시는 해볼 생각이다. 길게 보고 작업할 생각이기도 하고. 새로운 스토리텔링도 해보고 싶다. 내 역할은 세월호에 대한 관심의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게 만드는 거다. 세월호를 통해 한 사회에 ‘말을 걸고 있다’고 생각한다. 매개체로서 말이다.”

- 세월호 사진이 아니면 무엇을 찍고 싶은가. 

“첫 번째로 서울이라는 공간이 변화하는 모습을 담고 싶다. 틈틈이 찍고 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참 매력적인데 조금씩 매력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쉽다. 사라져가는 문화 자체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해외의 소외된 이들에도 관심이 많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 이슈를 다뤄보고 싶다. 시리아 난민을 담아보려 그리스나 헝가리 방문도 생각하고 있다.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네팔에 가서 사진 봉사하는 것도 10월 중순으로 계획하고 있다. 단순히 뉴스 사이클에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담는 작업, 그걸 하고 싶다.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던져보고 싶다.”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박준수씨의 작품 ⓒ박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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