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다툼이 장기화되면서 이번 롯데사태가 재벌의 지배구조 개혁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관련 대선공약만 지켜졌어도 재벌 지배구조의 문제가 일정 부분 해결됐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유종일 KDI 교수는 15일 오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회의실에서 열린 ‘재벌개혁을 위한 경제민주화 시즌2 토론회’에서 “지금 롯데그룹 사태는 재벌그룹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소유지배구조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이 롯데의 방식으로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롯데그룹 사태를 논할 때 한국에서 돈을 빼내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 일본의 비상장기업이 한국 재벌의 지배구조 정점에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본질을 호도하게 된다. 롯데가 누린 혜택도 롯데만의 문제는 아니다”고 말했다.

언론은 롯데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다툼을 ‘형제의 난’ ‘궁중쿠데타’ 등으로 표현했다. 신격호‧신동주‧신동호 등 롯데그룹 주요 인사들의 동정 하나하나를 부각시키고, 확인되지 않은 신격호 총괄회장에 대한 건강이상설을 보도했다. 이런 기사들을 두고 지나치게 가십거리에 치중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하지만 기자들 사이에서는 신격호 회장의 건강이상 여부가 중요할 정도로 롯데그룹의 의사결정권이 독점돼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항변한다. 실제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양측은 아버지 신격호 회장의 지시서와 음성, 동영상이 공개하면서 서로를 공격했고, 신격호 회장의 지시서가 법적 효력이 있는지에 대한 논란까지 일었다. 

   
▲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3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 경영권 분쟁과 관련한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유종일 교수는 “총수에 의한 황제경영과 경영권 세습이 존재하는 한 왕조시대 궁중암투와 같은 현상은 계속해서 벌어질 수밖에 없다”며 “롯데그룹 신씨일가 지분을 다 합쳐봐야 2.5%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손가락 한 번 휘둘러서 임원들을 해고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남근 경제민주화실현전국네트워크 정책위원장 역시 “롯데그룹의 내부분쟁이 해결되는 과정은 회사법의 기본 원리에 따라서가 아니었다”며 “총수의 지시서가 법적 효력이 있는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회사 이사들이 특정 총수 일가를 지지하면서 공방이 벌어지는 식이다. 근대적 경영형태로 보기 어려운 전근대적 경영형태”라고 비판했다.

총수의 황제경영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순환출자다. A사->B사->C사->D사로 지분을 서로 물고 물리는 방식의 순환출자는 적은 지분의 총수일가가 재벌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이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롯데그룹은 올해 4월 기준으로 총 416개의 순환출자 고리를 가지고 있다.

김남근 위원장은 “순환출자 기업이 총 459개인데 그 중 416개가 롯데그룹과 연결돼 있다. 이렇게 복잡한 구조 하에 있으니 내부인도 구조를 알기가 어렵다”며 “그래서 총수 일가가 서로 각자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내분을 벌어지는 것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순환출자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대한민국만의 독특한 경제구조로, 재벌의 탄생부터 정경유착과 부패를 만들어낸 원산지다. 이걸 개선하지 않고는 대한민국 경제가 선진경제로 진입하기 어렵다”며 “대한민국 총수일가가 지닌 평균 지분이 4.3%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지분으로 손가락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롯데의 경우 지배구조가 베일에 쌓여 있다. 한국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최상층에는 호텔롯데가 있고 호텔롯데의 최대 주주는 19.1%를 보유한 일본 롯데홀딩스다. 일본 롯데홀딩스와 그 최대주주인 광윤사에 대해서는 누가 얼만큼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직원 3명에 자본금 2억이 되지 않는 비상장기업(광윤사)이 매출 83조원의 재계 5위 그룹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두고 소액주주 권한 강화, 다중대표소송제, 일감몰아주기 및 내부거래에 대한 처벌 강화 등의 방안이 꼽히지만, 재벌개혁의 대부분 방안들이 이미 박근혜 대통령 공약에 포함됐던 내용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 권범철 작가 만평.
 

박근혜 당시 후보는 소액주주 등 비지배주주들이 독립적으로 사외아사를 선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총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도 표를 행사할 수 있는 집중투표제와 전자투표제, 다중대표소송제도 등 소액주주들이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단계적으로 도입하겠다고 공약했으나 논의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

2013년 7월 법무부가 주주총회에서 감사위원을 맡을 사외이사는 다른 이사와 분리 선출하는 내용을 담은 상법개정안을 입법예고하였으나 재계의 반발이 있은 뒤 법안발의를 미뤘고 국회에서도 논의가 멈췄다. 같은 달 법무부가 상법개정안에 일정규모 이상의 상장회사에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았으나 2013년 8월 28일 재계 총수와 대통령의 청와대 회동 이후 논의가 멈췄다.

지배주주의 전횡에 대해서도 박근혜 후보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에 대해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도록 형량을 강화하고, 기업비리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논의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

최재천 새정치연합 정책위의장은 “2013년 7월 16일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상법개정안으로 돌아가자.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의 겸직금지. 감사위원의 독립성 보장, 집중투표제와 원격 투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이 담겨 있다”며 “이것만 제대로 하더라도 순환출자 금지의 중요한 부분 틀어막을 수 있다. 대선 때의 경제민주화 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기존 순환출자를 해체하는 대신 신규 순환출자를 막자는 것이 박근혜 후보 공약이었으므로 박근혜 후보의 대선공약 자체에 한계점도 있었다. 이에 따라 2013년 7월 2일 신규순환출자 금지 위반시 해당 주식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공정거래법이 개정됐다. 

김남근 위원장은 “박근혜 후보가 경제민주화 및 재벌개혁 공약으로 제시한 것 중 딱 두 가지, 신규순환출자 규제와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에 대한 규제 강화만 지켰다. 나머지는 거의 이행되지 않거나 시작도 못했다며 ”롯데사태를 계기로 중단된 경제민주화를 다시 추진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최재천 정책위의장 역시 “2012년 12월 대선 당시 새정치연합과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70~80%가 유사했다. 공통의 공약을 입법화하는 데서 재벌개혁을 시작하면 된다”며 여야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정무위·보건복지위·법사위 간사로 구성된 양당 5+5 회담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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