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자신의 진퇴를 말할 때 아름답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자신이 물러날 때’를 알고 앞뒤 계산하지 않으면서 결단을 내리는 경우가 그렇다. 

지난 5월 성완종 리스트 의혹으로 물러간 이완구 전 총리의 후임 인사 논의가 한창일 때 의외의 인물이 회자됐다.

지난해 7·30 재보궐선거 수원 팔달 지역에 출마했다가 새누리당 정치 신인에게 패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손학규 전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다.

손 전 고문은 정계은퇴 선언에서 "지금은 제가 물러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며 "책임 정치의 자세에서 그렇고 새정치민주연합과 한국정치의 변화와 혁신이라는 차원에서 그렇다. 국민 여러분께 저녁이 있는 삶을 돌려 드린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다. 

4선의 국회의원과 행정부 장관을 지냈고 도지사 경험도 가지고 있고 매번 잠재적 대권주자로 거론된 손 전 고문에게 정계은퇴 선언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됐다. 하지만 7·30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하자 그는 '자신이 물러날 때'라며 미련없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 5월 후임 국무총리 후보 하마평으로 심심치 않게 이름이 회자되더니 여당 국회의원들 중에서도 손 전 고문의 총리 기용을 추천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석현 국회부의장은 "정계 은퇴한 손학규 전 상임고문을 야권 동의 하에 삼고초려해 책임 총리의 실권을 준다면 이 나라의 통합과 안정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호남지역 여론조사에서 손 전 고문은 대권주자로 지지율 통계에 잡힌 것을 넘어 1위를 차지했다. 손 전 고문이 만약 아직까지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면 나올 수 없는 현상의 결과다.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눈에 손 전 고문은 '행복한 사람'일 수 있다. 물러나고 싶어도 물러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 원내대표는 국회법 개정안 본회의 표결일이면서 친박계가 사퇴 시한으로 못박은 6일까지도 자신의 거취 표명에 입을 닫았다.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는 의원총회 소집요구서가 오면 의총 개최를 고려해보겠지만 자진 사퇴 요구엔 응하지 않겠다는 것이 6일 현재 유 원내대표의 입장이다. 유 원내대표 사퇴 관건은 '명분 찾기'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 원내대표가 물러날 최소한의 이유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6일 국회 본회의에서 새누리당이 국회법 개정안 재의 표결에 불참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는 명분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국회법 개정안은 당초 새누리당 의원 93명이 찬성했고 여야 의원 3분의 2 찬성으로 합의 통과된 내용이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죄라면 의원들의 찬성 의견을 수렴한 게 전부다. 유 원내대표가 원활한 당청 관계를 이유로 사퇴할 경우에도 의원들의 투표로 뽑힌 원내대표가 불신임 절차 없이 대통령 말 한마디에 물러나는 전례로 남게 된다. 

유 원내대표가 '자신이 물러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이유도 명분과 절차 등 여러 면에서 부적절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로 유 원내대표가 사퇴하게 되면 그는 대통령의 찍어누르기에 당한 '희생양'이 되고 불명예스러운 퇴장이 되는 것이다. 진퇴에 대한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자진사퇴는 결코 아름다운 일이 아닌 것이다. 

지난 2005년 행정도시특별법 국회 통과를 놓고 당시 당 대표를 맡았던 박근혜 대통령이 끝까지 사퇴 요구를 거부한 것도 그의 사퇴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005년 3월 2일 행정도시특별법이 통과하자 이를 반대해온 의원들은 한나라당 지도부 사퇴를 주장하며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범국민 반대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당시 한나라당 내분 양상은 현재 유 원내대표의 거취 문제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이재오, 김문수 의원 등 특별법 반대파 의원들은 "박근혜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가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무원칙으로 상황에 끌려다녔다"고 비난했고, 박세일 정책위의장과 심재철 전략기획위원장, 안상수 재보선 공천심사위원장은 당 지도부의 입장과 달리 사퇴해버렸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반대파의 법안처리 유보 요구에 대해 "절차와 공당으로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재투표를 생각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박 대통령은 "천재지변이 아니면 당론을 번복하는 것은 국민의 신뢰를 잃는다"는 과격한 발언도 내놨다.

결국 2일 밤 국회 본회의에서 의장 직권으로 안건이 상정돼 처리되면서 한나라당 내홍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한나라당 특별법 반대파는 '수도 이전 저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국민투표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이에 박 대표 흔들기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지만 김덕룡 원내대표가 "당의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원내대표직에서 사임하는데 이르렀다.

   
▲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노컷뉴스
 

그럼에도 박근혜 대표 사퇴 주장은 끊이지 않았다. 2005년 3월 10일 긴급 의원총회에서 안상수 의원은 "당 지도부가 사전 고지도 없이 의총에서 행정도시법에 대해 찬성 쪽으로 몰고간 것은 잘못"이라며 "김덕룡 원내대표가 사퇴한 마당에 박근혜 대표도 당연히 사퇴를 해야 한다"고 했고 김문수 의원은 "수도 이전은 노무현 정권이 나라를 망치는 핵심인데 한나라당이 이 같은 망국노선에 공조를 하고 있다. 그 첫번째 책임은 박 대표에게 있다"고 사퇴를 주장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내 사전에 재신임이란 없다. 그만 두면 그만 두는 것이고 임기 끝까지 가면 끝까지 가는 것"이라고 말해 사퇴를 포함해 조기 전당대회 소집 요구를 일축했다. 박 대통령은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누가 뭐라고 하기 전에 물러나는 것"이라며 행정도시특별법 통과에 따른 자신의 책임과 잘못이 없음을 강변했다.

박 대통령이 당시 특별법 반대파들의 거센 사퇴 요구에도 반대하며 내세웠던 것이 바로 명분과 절차였던 셈이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당시 당 대표 비서실장은 맡고 있던 사람이 유승민 원내대표였다. 유 원내대표는 "(4월 임시국회로 특별법) 처리를 연기해봤자 별 성과가 없을 것"이라며 "행정도시법의 내용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지 않느냐"며 특별법 처리 연기와 지도부 사퇴 요구를 반대했다. 

유 원내대표가 현재 찍어누르기 논란에 대해 박 대통령의 과거 발언처럼 "내 사전에 재신임이란 없다"며 끝까지 버티기에 들어간다면 박 대통령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박 대통령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유 원내대표는 ‘자신이 물러날 때’와 이유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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