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에게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는 말은 자신을 향한 칼날이면서도 상대방을 겨냥한 총구가 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두고 배신의 정치를 한 당사자로 몰아세우면서 사퇴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배신’을 키워드로 한 박 대통령의 정치 이력도 회자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2002년 박 대통령의 탈당 사태다. 지난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 12월 10일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던 박 대통령은 2002년 한나라당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로 맞붙은 이회창 총재에 대해 배신감을 토로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 박 대통령이 밝힌 탈당의 변이 현재 배신의 정치인으로 낙인이 찍힌 유승민 원내대표의 처지와 비슷하다. 

박 대통령은 탈당의 변에서 "지난 총선을 앞두고 민국당이 창당될 때 나는 중심을 잡고 움직이지 않으며 이 총재를 도왔으나 이 총재는 나를 견제하고 경쟁자로만 생각하고 있다"며 "정당개혁의 핵심은 1인지배 정당체제 청산이다. 과거보다 이 총재 1인지배체제가 더욱 굳혀지고 있고, 이런 식으로 당을 운영하는데 집권한다고 나아지겠는가"라고 말했다.

특히 박 대통령은 "대선 전 정당개혁을 이뤄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진정한 수권정당으로 거듭나야 정권교체의 의미가 있다는 확신 아래 대선 전 총재직 폐지와 상향식 공천제도 도입, 투명한 당 재정운영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해 왔으나 결과는 1인지배체제의 틀 안에서 국민참여경선의 모양새만 갖추는 것이 되고 말았다"고 비난했다.

박 대통령은 "나는 당내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한나라당이 희망의 새 정치에 앞장설 테니 지지해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해왔으며, 이는 나의 신념이었고 국민과의 약속이었다"면서 "결국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고 변화하지 않은 모습으로 국민지지를 호소할 수는 없었다"고 토로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이회창 총재의 1인 지배체제 때문에 정당개혁 민주화가 요원하다는 진단 아래  정당 개혁을 위해서라도 탈당해 정계개편의 축이 되겠다며 사실상 선전포고를 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과거 모습과 비교하면 박 대통령은 자신이 그토록 반대했던 1인 지배체제의 모습을 보여주며 의원들이 뽑은 원내대표를 찍어누르기 하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유 원내대표가 원활한 당청 관계를 강조하면서 타협의 정치를 강조해온 것도 역설적이다. 

박 대통령의 발언 이후 친박계 의원들이 지시를 기다렸다는 듯이 유 원내대표를 압박하는 모양새 역시 정당민주화하고는 거리가 먼 행태들이다. 

박 대통령은 당시 한나라당을 박차고 나간 뒤 정확히 9개월 뒤에 미래연합 대표로서 당대당 통합을 제안했고 한나라당이 수용해 복당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이회창 후보가 정치개혁을 약속했다"며 복당했지만 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하락하고 이회창 후보의 지지도가 상승한 탓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차라리 탈당했다 수개월 만에 돌아올 바에야 당내에서 정당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명분이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박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아버지에 대한 당내 비판이 표출될 때도 강한 배신감을 여러차례 토로했다. 

지난 1999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독재의 상징이라고 비난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계획을 정략적인 술수라고 비판했다. 이에 한나라당이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침묵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상당한 배신감을 나타냈다. 당시 이회창 총재 측은 박근혜 대통령(당시 부총재)이 대권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개인 전략팀을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문제를 두고 박 대통령이 배신을 운운하는 일은 다음해에도 계속됐다. 지난 2000년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예정지를 둘러싸고 경북지역 의원들이 "기념관은 생가가 있는 경북 구미에 건립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자 박 대통령은 "그동안 기념관 건립에 대해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던 경북 의원들이 이제 와서 구미에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념관 건립을 훼방놓는 것에 다름아니다"며 "굉장한 배신행위"라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박 대통령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도록 서울 상암동으로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기념사업회의 의견에 동조했다.

지난 2004년 박 대통령이 당 대표로 있을 때 과거사 청산 문제를 놓고도 격론을 벌이면서 '배신'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전남 구례 곡성에서 개최한 의원연찬회 자리에서 한나라당 비주류 의원들은 당 대표인 박 대통령을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한나라당 비주류 측인 김문수 의원은 "박 대표는 누가 정수장학회의 문제점을 제기하든지 간에 당당히 조사에 응해야 한다"고 했고, 이재오 의원은 "친일 및 유신독재의 잘못에 대해 깨끗하게 사과하고 털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작심한 듯 비주류의 탈당까지 시사하며 '배신의 정치'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박 대통령은 "한국에는 다른 정당도 많은데 (한나라당이)역사의 죄가 많은 당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정당을 택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국가 정체성과 관련한 질의서에는 답하지 않고 유신 운운하며 사과 요구하는 열린우리당과 똑같은 어조로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며 "사과를 요구하는 분들이 15, 16대 때는 당의 실세였는데 그 때는 왜 사과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느냐. 저에게 대표직에서 물러나라는 것인지 자기들이 대표를 하겠다는 것인지 정정당당히 하라"고 쏘아붙였다.

   
▲ 박근헤 대통령.
 

당시 연찬회 자리가 박 대통령의 반발로 격앙된 모습을 보이자 심재철 기획위원장은 "수위 조절 좀 하라"고 했지만 박 대통령은 "대표에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10% 지지대로 떨어졌던 당을 제2당으로 만들어준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거침없는 박 대통령의 반발에 김문수 의원은 "열린우리당과 같다니 사실상 파국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며 당혹감을 나타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유신 정권 정체성에 대한 비판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박 대통령은 자신이 대표로 있을 때 한나라당 지지를 끌어 올린 것에 대해서도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2005년 출간된 "대통령의 딸 박근혜를 말한다"는 박 대통령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되고 정계에 입문한 1997년가지 은둔 시기에 주목해 ‘배신의 정치’를 체화한 박 대통령을 분석했다.  저자는 당시 박 대통령의 심리 상태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의 인터뷰를 통해 "배신감과 허무주의로 인한 우울증 환자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증상"을 보였다고 전했다. 당시 박 대통령의 일기에 '태어나지 않았으면'이라는 대목이 나온 것도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박 대통령이 정치 지도자로서 거듭난 것은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구원투수’로 나서 치러진 총선에서 예상을 깨고 121석을 얻으면서다. '선거의 여왕'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선거'는 그를 정치 지도자의 반열로 올려놓았고 존재 이유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자신이 당 대표직에 있을 때 당선된 사람 역시 자신의 수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한 '배신' 역시 이 같은 생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 자리에서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해 "결국 그렇게 당선의 기회를 달라고 당과 후보를 지원하고 다녔지만 돌아온 것은 정치적 도덕적 공허함만이 남아있다"며 "정치가 정도로 가지 않고 오로지 선거에서만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정치를 정쟁으로만 접근하고 국민과의 신의를 져버리고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정치는 이제 끝을 내야 한다"고 말했다.  

1인 지배체제를 비판하면 탈당까지 감행하고 당 대표가 돼서 선거의 여왕이 됐던 박 대통령에게 유승민 원내대표는 '여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정치'를 하는 배신의 아이콘이 돼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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