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출판 기념회를 가진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의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 356 쪽을 보면, 주한 미 대사시절, 그가 미 군부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사연이 나온다. 한반도 평화와 북한의 핵개발 방지를 위해, 주한 미 대사로서 자신이 기울인 노력이 한미 국방부의 방해로 ‘물거품’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그 대사의 관련 회고록의 내용을 축약하면 아래와 같다.

“남한정부는 북방정책이 결실을 맺으면서 북한과 접촉하려는 발걸음의 속도와 강도를 더욱 높이기 시작했다.(중략)

매년 봄 실시되는 팀스프릿 훈련은 수천 명의 미군을 한반도로 수송해서 한국을 침공한 가상의 북한군을 퇴치하도록 설계된 훈련 과정을 되풀이했다. 북한은 이 훈련을 극도로 싫어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미군을 대거투입해서 그들의 남침을 격퇴한 1950년의 충격적인 굴욕을 해마다 상기시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중략)

엄청나게 밀고 당기기를 계속한 끝에 로버트 리스카시 장군과 나는 펜타곤과 한국 국방부를 설득해서 1992년 팀스프릿 훈련 취소에 동의를 얻어냈다. 그들은 1991년 말에 이를 발표했다. 그리고 나서 남북한은 일련의 중요한 합의문에 서명했다. 1991년 12월 13일 서명한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양측이 남북화해・상호불가침・교류협력을 향해 나아가기로 선언했다. 그해 12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 내에 핵무기가 없다고 선언했다. 12월 31일에는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요구와 국제원자력기구의 핵사찰을 허용한다는 선언을 담은 ‘합의문’을 발표했다.(중략)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행복한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2년 가을에 펜타곤에서 열린 연례 안보참모회의에서 팀스프릿 훈련을 1993년 3월에 다시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양국의 군사기관들은 이 훈련작전이 제공해주는 더할 나위없이 귀중한 훈련 기회에 대해 떠들어댔고, 딕 체니 국방장관은 국무부나 나하고는 의논조차 없이 훈련을 부활시키고 말았다.

   
 
 

나는 완전히 기습을 당한 꼴이었다. 미국은 대통령 선거전이 혹독한 막바지에 이르렀고, 부시대통령이 직원을 이용해서 자기 국방장관의 결정을 뒤엎는 어떤 행동이라도 하는 경우에는 민주당쪽의 정치공세를 허용할 수 있었다.(중략) 나는 그것이야 말로 내가 대사로 봉직하던 기간 중에 미합중국이 결정한 유일한 최악의 실수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 결정의 쓰디쓴 열매는 이내 나타났다.(중략) 김정일은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팀스프릿 기간 중 북한에 준전시체제를 선언했다. 그리고 1993년 3월 13일 북한은 핵확산방지조약(NPT)을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남북의 문제는 남북 정권 간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미국 내부 정치와 군당국의 문제도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레그 대사의 이 회고록에는 그가 6차례의 북한을 방문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북한 지도부가 미국에 대해 갖고 있는 ‘불신’과 ‘두려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미국의 정부가 바뀔 때마다 혹은 정부 내부기관들의 역관계에 따라 북한을 다루는 태도가 일관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평양권력자들의 불신과 두려움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게 하고 있다.

그의 회고록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움직이지만, 상대국의 처지를 고려해 ‘윈윈’이 될 수 있는 화법과 해법을 찾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 움직이는 따뜻한 ‘현실주의자’로서 그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여한 ‘비사’를 비롯해 CIA 한국지국장과 주한 미국대사 시절, 그가 경험한 흥미로운 과거사들도 담고 있다.

도널드 P그래그 지음 / 차미례 옮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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