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이 오는 2일 출간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이미 몇몇 언론사를 통해 책의 내용이 알려지고 있다. 무려 800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 속에는 이 전 대통령의 어린 시절부터 재임시절의 각종 현안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회고록 속에 등장한 이명박의 ‘말’들을 정리해봤다.

“금융위기에서 벗어날 즈음 내 병도 완치됐다”

이명박은 스스로를 ‘경제 대통령’으로 불렀다. 그런 만큼 회고록도 경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2008년 금융위기와 각종 경제정책들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차 있다. 책 전체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외교 부분도 사실 FTA, 자원외교 등 경제성과로 치환된다. 그는 자신을 대통령이 아닌 경영자로 인식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통치가 아닌 경영을 하고자 했다”

“(서울시장 때) ‘경영 마인드라는 게 뭡니까? 고객 제일주의 아닙니까? 시민이 광장을 원하는데 교통이 막힌다고 광장 조성을 포기하는 것은 고객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서울시 간부들의 의구심에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도 새로운 정치를 하고자 노력했다. 국가 통치가 아닌 국가 경영의 입장에서 사안에 접근하려 애썼다”

금융위기 때 병을 앓은 이야기도 등장한다.  

“아마도 취임 후 광우병 사태부터 세계 금융위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발병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어떻게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국가경제 규모는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훨씬 커져 한 번 넘어지면 임기 내내 노력해도 극복하기 어려울 텐데……. 이런저런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금융위기에서 벗어날 즈음 내 병도 완치됐다“

   
▲ 이명박 대통령. ⓒ청와대
 

광우병 사태 때 ‘원칙’ 지켜 금융위기 극복? 

‘경제 대통령’ 이명박은 취임 첫 해부터 큰 위기에 직면한다.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열린 촛불집회 때문이었다. 지지율은 10%대까지 추락했다. 그는 광우병 사태를 ‘내부로부터의 도전’이라 표현한다.

“ MBC 이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 프로그램의 주요 주장엔 문제가 있었다. (중략) 수많은 검증되지 않은 주장들을 방송에 담았다. 심지어는 오역을 해서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을 부풀리기도 했다. 그 프로그램만 본다면 3억 미국인들과 우리 국민들은 식품이 아니라 독극물에 가까운 미국산 쇠고기를 먹는 셈이었다“

이 방영되자 중고생들을 중심으로 인터넷에 광우병 괴담이 퍼져나갔다. “광우병은 공기로도 감염된다”, “화장품이나 젤라틴 성분이 들어간 생리대, 기저귀로도 전염된다”, “쇠고기를 다룬 칼과 도마로 수돗물까지 오염된다” 등으로 그야말로 괴담이었다“

“공기업 노조를 비롯해 시민단체 등도 집회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새 정부의 공기업 개혁에 대한 논의가 영향을 미친 결과였다. 조직을 통폐합하고 정원을 줄이며, 일부 공기업은 민영화를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이 공기업 노조를 자극했다”

“집회가 정권 퇴진 주장 양상으로 변하자 일각에서는 17대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대선 불복 세력’이 집회를 주도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대선 불복 세력이 건강을 염려하는 순수한 국민들의 뜻에 편승해 대통령과 정권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 세력들이 집회에 개입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MBC PD수첩’이 광우병 사태를 촉발시켰다고 보는 것처럼 이명박은 광우병 사태를 통해 언론환경의 문제점을 발견한 듯하다.

“당시 공영방송은 전임 정부가 임명한 경영진과 노조가 좌우하고 있었다” 

“이처럼 언론 환경과 정치 환경 모두가 새 정부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정부의 입장을 국민에게 합리적으로 전달할 통로가 막혀 있었다. 대통령 실장을 중심으로 모든 수석들이 언론사를 분담해 언론사 간부들과 기자들을 만나 이 문제를 설명했지만 역부족이었다”

MB식 불통의 대명사로 불리는 명박산성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명박산성’, ‘MB식 소통이 이런 것이냐’하는 비판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물리적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수십만 명의 시위대와 경찰이 맞부딪치는 상황에서 큰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광우병 사태는 이명박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만일 내가 정치적 이해를 따졌다면 이런 논란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국익이 손상되더라도 ‘재협상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협상을 파기해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광우병 집회도 끝나고 정치적 타격도 훨씬 적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17대 대선에서 나를 선택한 국민들은 정치적 판단에 휘둘리지 않고 제대로 일하기를 기대할 것이라 믿었다”

“광우병 사태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신뢰도를 높이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중략)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원칙을 지킨 것이 국제사회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후 세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한국의 국가부도 사태를 막은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이나 한국의 G20 참여, G20 정상회의와 핵안보정상회의 유치 등 굵직한 외교적 성과의 이면에는 광우병 사태를 계기로 쌓인 국제사회의 신뢰가 있었다”

   
▲ 지난 2008년 6월10일 서울 광화문 일대는 촛불을 든 시민으로 가득했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광우병 사태는 이명박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다. 이명박은 이후 여러 정책사안의 반대에 부딪칠 때마다 광우병 사태 때의 ‘그 세력’을 언급한다.

“9월 위기설이란 그해 5~6월의 광우병 파문이 진정되면서 곧바로 등장했다. (중략) 광우병 사태를 주도하던 세력 중 일부가 9월 위기설을 매개로 인터넷을 이용해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시위는 한·미 FTA를 미국에 의한 한국의 종속구조를 심화시키는 구도로 보고 원천적으로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시위의 주동세력은 단체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광우병 사태, 제주 해군기지 건설, 평택 미군기지 이전을 비롯해 각종 국책 사업 반대 시위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들이었다”

한미FTA 반대에 “반대를 위한 반대 죄다 모아놔”

이명박은 본인이 하는 일이 반대에 부딪칠 때마다 이를 ‘거짓’ ‘막연한 두려움’ 나아가 ‘정치공세’로 파악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인다. 

“(농산, 축산물 종사자에게) FTA가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는 재앙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이 같은 막연한 두려움은 곧잘 대대적인 FTA 반대 시위로 이어졌다. 심지어 정치권 일각에서는 그런 불안 심리를 부추겨 반사적 이익을 얻고자 했다. 그로 인해 FTA 체결은 경제 분야를 넘어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미 FTA 12개 독소조항’이란 주장은 그런 수준을 한참 벗어난 내용이었다. 대부분이 사실을 지나치게 왜곡하거나 과장하고 있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의 명분을 죄다 모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민주당이 미국과의 FTA에서 ISD 조항을 걸고 나선 의도는 당시 서울 시가지에서 계속됐던 한·미 FTA 반대 시위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진보단체들의 주도로 여의도와 광화문 일대에서는 한·미 FTA 반대 시위가 연일 계속됐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의 본질이 왜곡되고 정치 쟁점화되는 과정에서, 국익을 훼손시키면서까지 국제사회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반대하는 일부 시민단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한·미 FTA 결사 반대!’ 선정적인 보도가 이어졌고 반대자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여기서 흔들려서는 안 된다. 참고 설득하기를 거듭했다. 그러나 거짓이 걷히고 진실이 드러나기까지 금쪽같은 시간이 헛되이 흘러갔다. 상처도 입고 아픔도 있었지만 결국 한·미 관계를 복원하고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겠다는 나의 정책 의지를 관철할 수 있었다”

심지어 반대세력에게는 ‘북한’ 딱지를 붙이기도 한다.

“(북한은) 2007년 내내 반(反)한나라당, 반(反)보수 선동을 이어나갔고, 내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되자 나에 대한 비방에 집중했다. 17대 대선 과정에서 국내 일부 세력들은 인터넷 등을 통해 북한의 주장과 같은 내용으로 나를 비방했다. 정치권과 일부 언론마저도 이에 동조했다”

무상급식은 ‘무차별 복지’, 반값등록금에는 ‘자기 책임의 원칙’

회고록에는 현안에 대한 이명박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2012년 대선 때 등장했던 각종 복지와 경제민주화 공약은 사실 이명박 재임시절부터 공론화되기 시작했던 것들이다. 

“부유층에게까지 무상급식을 확대하기보다는 우선 시급한 복지 수요가 많았다. 우리 정부를 ‘부자정권’이라 비난하던 민주당이 부자들에게까지 복지 혜택을 주겠다고 나서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행태였다. 민주당은 무상급식을 ‘보편적 복지’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이를 ‘무차별 복지’, ‘정략적 복지’라 생각했다”

“대학교육은 의무교육이 아니며, 그 혜택은 인적자본이 축적되는 형태로 당사자인 대학생에게 돌아가므로 자기책임원칙이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또 대학생은 장차 고소득층에 속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도 등록금 부담을 일반 납세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아무리 좋은 복지정책도 안정된 일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결국 최선의 복지는 기업을 육성해 건강한 일자리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또한 복지예산도 대부분 기업 활동에서 비롯된 세금으로 충당된다. 기업이 사라지면 일자리도 복지예산도 사라진다. 민생과 복지를 위해서도 기업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대운하 반대론자들, 막무가내로 대운하 사업 물고 늘어져”

그가 재임했던 시기 그가 벌였던 일들은 아직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다. 자원외교는 국정조사를 앞두고 있고, 4대강 사업 역시 국정조사 요구를 받고 있다. 법인세, 기업인 특별사면 등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2014년 12월 현재, 야당은 우리 정부의 해외 자원 개발 실적에 대해 공세를 펴고 있다. 자원 외교는 그 성과가 10년에서 30년에 거쳐 나타나는 장기적인 사업이다. 퇴임한 지 2년도 안 된 상황에서 자원 외교를 평가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라 생각한다.“

“특히 야당의 비판이 사실과 대부분 다르다는 점에 큰 문제가 있다. 과장된 정치적 공세는 공직자들이 자원 전쟁에서 손을 놓고 복지부동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이 같은 상황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고위험-고수익 구조라는 자원 개발의 특성상 해외 자원 투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어지는 것이다. 실패한 사업만을 꼬집어 단기적인 평가를 통해 책임을 묻는다면 아무도 그 일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 아랍에미리트를 방문중인 이명박 대통령이 2012년 11월 21일 오후(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알아인 알-라우다궁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에서 칼리파 빈 자이드 알 나흐얀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들어서면서 한반도 대운하 건설은 정치적 반대세력들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반대론자들은 막무가내로 대운하 사업을 물고 늘어졌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은 단일 공사로는 건국 이래 최대의 역사라 할 만큼 공사 규모가 컸다. 따라서 오랜 시간 검토와 계획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로 경제 살리기가 시급한 상황에서 계획을 세우느라 시간을 허비할 여력이 우리에겐 없었다”

“감사원이, ‘대운하 위장설’ 같은 것을 발표하는 행위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수많은 하천 관련 전문가들이 공을 들여 기획한 것이다. 감사원의 비전문가들이 단기간에 판단해 결론을 내릴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민주당은 ‘부자 감세’라며 감세정책을 비난하고 나섰다. 소득세 인하의 효과는 고소득자에게 더 크게 돌아가며, 법인세 인하의 효과는 대기업에게만 돌아간다는 주장이었다. 2007년 민노당이 전임 정부를 비판했던 것과 비슷한 논리였다”

“감세는 투자와 소비를 촉진시켜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한 세계적인 추세였다. 특히 세계 금융위기로 경기 부양이 시급한 상황에서 G20이 선택한 국제 공조 차원의 대응책이기도 했다. ‘부자 감세’라는 왜곡된 단순 논리로 치부될 일이 결코 아니었다”

“나 역시 평창 유치를 위해 이건희 회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회장에 대한 사면·복권은 야권의 대대적인 정치 공세를 불러올 가능성이 컸다. 우리 정부에 ‘부자 정권’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워 비난하던 야권이 이 회장 사면을 그대로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국익을 선택해야 하는지 아니면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갈림길에 섰다. 야권의 공세로 인한 정치적 타격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직은 내 삶의 큰 자산”

800쪽에 달하는 회고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이명박 대통령이 재임시절 자신에 대한 반대를 ‘정치공세’로 판단하며 이를 밀어붙였고, 더 밀어붙이지 못해 아쉬워했다는 것이다. 회고록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정직은 내 삶의 큰 자산이었다. 때로는 곧이곧대로 하는 바람에 어려움도 겪었지만 결국 그로 인해 신뢰를 쌓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이 회고록을 읽는 독자들도 이명박의 시대를 이와 같이 떠올릴 수 있을까? 

   
▲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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