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지하혁명조직 RO의 실체는 없었다. 대법원이 22일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 내란선동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검찰과 변호인 쌍방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고 2심 선고를 확정 판결한 것이다.

대법원 판결은 내란과 관련한 구체적인 행위가 없었음을 사법부가 최종 확인했다는 의미가 크다. 역대 내란사건이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이석기 전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가 인정되면 최초의 내란사건으로 기록될 예정이었지만 사법부는 이 전 의원의 내란음모죄는 없다고 재확인한 것이다. 

특히 내란음모 혐의의 핵심 근거인 RO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내란사건이 정치적 공세에 따른 것이라는 비판도 예상된다. 

검찰은 13차례 진행된 공판에서 내란음모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RO의 실체가 있다고 주장했다. 내란음모 목적을 가지고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가진 RO가 있기 때문에 내란음모의 위험성이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검찰의 논리였다. 공소사실 대부분도 RO의 실체를 입증하기 위한 내용으로 돼 있다. 박근혜 정부가 청구한 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에서도 "핵심세력인 RO의 내란음모 등 그 활동도 북한의 대남혁명 전략에 따른 것으로 분석됐다"고 강조했다. 헌법재판소도 통합진보당 해산시키면서 사실상 RO의 실체를 근거로 내세웠다. 2심 재판부는 하지만 '진보당=RO', '총책=이석기'라는 등식을 깨버렸다. 내란음모죄가 성립되려면 내란 음모에 합의할만한 내용과 조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RO가 없기 때문에 총책도 없고 내란음모 지시도 내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2심 선고를 확정한 대법원 판결은 사실상 검찰의 공소제기를 뿌리째 흔들어 무용지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치욕을 안긴 것이고 검찰이 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헌법재판소의 진보당 해산 결정도 입지가 좁아졌다. 헌재는 “회합을 주도한 이석기의 경기동부연합의 수장으로서의 지위 및 이 사건에 대한 피청구인(진보당)의 전당적 옹호 및 비호 태도 등을 종합하면 이 회합은 피청구인의 활동으로 귀속된다”면서 RO에 의한 내란 음모 사건은 진보당의 활동으로 볼 수 있고 구체적인 위험성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은 RO 조직이라는 것을 인정치 않았고 따라서 국헌 문란의 구체적인 위험성도 없다고 봤다.

다만 대법원이 내란선동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것은 법리적 모순이라는 지적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결과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애초 대법원 선고는 2심 선고를 뒤집어 모두 무죄를 선고하거나 내란음모까지 모두 유죄로 선고하는 판결, 그리고 2심 선고를 확정 판결하는 3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대법원이 내란음모까지 유죄로 선고했다면 역사상 최초로 사법부가 내란의 실체를 인정해 죄를 묻고 지하혁명조직 RO를 내란음모 조직으로 봤던 검찰의 손을 들어준 것이고 급속도로 공안정국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반대로 대법원이 내란음모와 내란선동까지 무죄로 선고해 파기환송시켰다면 박근혜 정부의 공안몰이에 사법부가 제동을 건 것이고, 종북몰이가 정치적 공세 차원에서 진행됐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로부터 비난을 최소화할 수 있는 2심 선고 결과를 확정한 것이다. 

지난해 2심 선고 당시에도 진보 쪽에서는 내란음모도 없었는데 어떻게 발언만 가지고 선동죄를 물을 수 있느냐'는 반발이 나왔고, 역으로 보수 쪽에서는 내란 선동은 내란을 계획하기 위해서 나왔기 때문에 내란음모 혐의도 유죄라고 주장했다. 

대법원은 2심 선고를 확정 판결하면서 결과적으로 보수-진보가 유리한대로 해석하는 싸움을 구경하는 셈이 됐다. 사법부가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줘 비난을 뒤집어쓰기 보다는 양쪽 진영이 싸울 수 있도록 판을 벌어주는 식으로 정치적 판결을 내렸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국제사회도 대법원 판결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적당한 타협의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쏟아지는 비판을 피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12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이석기의 유죄판결이 1987년 이전의 군사독재 정권에서 만들어진 매우 억압적인 국가보안법에 근거해 내려졌다는데 주목하고 있다"며 "이 판결이 대한민국의 국제인권조약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와 매우 성공적으로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한국의 국제적 명성과 모순되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제앰네스티도 지난 20일 성명을 통해 진보당 해산과 예정된 대법원 선고 등을 언급하면서 "표현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국가안보에 실질적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비례적이고 필수적인 경우에 한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정치적 판결이라는 분석이 나오지만 내란선동 혐의 유죄 판결은 법리적 모순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내란선동 혐의도 내란음모와 마찬가지로 범죄를 실행되기 전 실질적 위험성이 존재함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석기 전 의원의 구체적인 위험한 행위는 드러난 적이 없다. 더구나 내란음모가 다수에 의한 합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면 선동은 말그대로 단독으로 한 행위이기 때문에 내란음모 행위보다 선동의 행위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위험성을 가져야 하는데 재판부는 이를 입증할 만한 내용을 밝히지 못했다. 내란음모는 무죄로 선고하면서 어떻게 선동만을 따로 떼내어 죄를 물을 수 있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홍성규 전 진보당 대변인은 선고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진보당을 해산시켰던 결정적 근거가 모두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내란음모가 없었는데 내란선동은 있었다는 이율배반적인 판단은 그대로 남았다"며 "대법원에서조차 정권에 대한 눈치보기 판결이 그대로 이어진 셈"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 판결이 향후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급속히 위축시킬 것이라는 전망도 지배적이다.

이호중 교수(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는 22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정부의 문제가 많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순간 내란 선동에 걸리는 상황이 된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에 엄청난 제약을 가져오는 법 질서”라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내란 선동죄는 대법원 판례가 없었는데 이런 상태에서 곧바로 내란으로 가는 위험이 없더라도 선동에 의해서 다른 사람이 내란으로 나아갈 가능성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법 이론상 음모죄이든 선동죄이든 실질적 위험성을 엄격히 해석해야 하고 음모혐의가 부정되면 선동죄도 없는 건인데 교묘하게 분리를 시켜놓은 것”이라며 “지난해 5월 10일 모임은 누가 봐도 내란에 이르는 합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워 유죄를 하기엔 대법원이 부담스러웠을테고 선동죄마저도 무죄로 하면 난리가 나기 때문에 음모죄와 선동죄 요건을 비틀어서 마침 판례도 없기 때문에 선동죄에 유죄를 선고해 정치적 타협을 만들어 내는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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