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를 본 수많은 중국 시청자들이 의상과 패션잡화 등을 사기 위해 한국 쇼핑몰에 접속했지만, 결제하기 위해 요구하는 공인인증서 때문에 결국 구매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요구하는 공인인증서가 국내 쇼핑몰의 해외 진출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개혁 점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말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전혀 맥락을 짚지 못한 엉뚱한 지적이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배우 전지현씨가 입고 나온 코트를 사겠다는 중국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지만 정작 신용카드 결제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른바 천송이 코트 논란은 공인인증서라기 보다는 액티브엑스나 해외 신용카드 지원 문제라고 보는 게 맞다. 애초에 30만원 미만은 공인인증서를 요구하지 않기도 하고 비자·마스타 등 해외 신용카드의 경우 30만원이 넘어도 공인인증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결국 중국 사람들이 천송이 코트를 사고 싶은데 못 산다는 박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지만 덕분에 일부 규제 장벽이 낮아진 것은 사실이다. 중국의 알리바바가 롯데백화점 등과 제휴해 한국을 찾은 중국 관광객들에게 알리페이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페이팔과 아마존 등도 한국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이른바 핀테크(finance+technology) 시대가 도래했는데 상대적으로 국내 업체들만 발이 묶여 있다는 볼멘 소리도 나온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한 장면. ⓒSBS.
 

그동안 국내에는 여신전문금융업법에 비금융 업체가 신용카드 정보를 저장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나 지난 8월에서야 일부 허용됐다. 30만원 이상 거래에 공인인증서 사용을 의무화한 전자서명법과 전자금융거래법도 지난 8월에서야 개편됐다. 성종화 이트레이드증권 연구원은 “세계 최고 정보기술(IT) 기술력을 가진 한국이 최근까지 핀테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건 과도한 규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알리페이는 가입자 수가 8억명이고 활성 사용자 수만 해도 1억3000만명에 이른다. 지난해 결제대금이 무려 450조원, 올해는 670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알리바바의 계열사인 중국 최대의 쇼핑몰 타오바오를 비롯해 온라인 결제는 기본이고 스마트폰 바코드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오프라인 결제도 지원한다. 교통요금이나 공공요금도 알리페이로 받는다. 현금이 필요 없는 전자결제의 세상이 이미 중국에서는 열렸다고 볼 수 있다.

국내에서도 다음카카오의 카카오페이나 네이버의 라인페이 등이 론칭했지만 아직까지는 친구들끼리 송금 용도로 쓰는 수준이다. 박혜진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알리페이는 가졌는데 페이팔이 갖지 못한 것이 오프라인 거래고 카카오와 라인은 모바일은 가졌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갖고 있지 않다”면서 “사용처가 제한적인 결제수단은 소비자들에게 환영받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특히 알리바바는 알리페이와 함께 위어바오라는 이름으로 알리페이에 충전된 여유 자산을 MMF 등 단기 금융상품과 연계해 위탁운용하는 자산운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수시 입출금이 가능하고 최소 1위안 단위 투자가 가능한 데다 연 5~6%의 파격적인 금리를 제공해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가입자가 1억명, 자산총액이 5723억 위안(원화 기준으로 94조원)까지 불어났다. 금융업 진출 요건이 엄격한 한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IT 기업의 금융업 진출 현황. ⓒ이트레이드증권 자료.
 

알리페이는 2012년 알리바바파이낸셜이라는 이름으로 소액대출 시장에 뛰어들어 무보증 무담보 신용대출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고객들의 알리페이 결제 내역을 바탕으로 구매 패턴과 현금 흐름, 심지어 수도·전기요금 납부 실적 등의 빅데이터를 종합해 3분 만에 신용분석을 끝내고 대출금을 지급한다. 이런 시스템 덕분에 대출 자산 건전성도 시중은행 대비 높다. 역시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서비스다.

영국의 HSBC는 핀테크 기업인 잽과 제휴해 이름과 카드번호, 유효기간 등의 정보를 입력하지 않고 비밀번호 입력만으로 결제가 가능한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JP모건과 웰스파고 등은 페이팔처럼 이메일 주소나 휴대전화 번호만으로 결제할 수 있는 클리어익스체인지라는 모바일 결제 서비스를 시작했다. 영국의 바클레이즈는 전화번호와 QR코드 등으로 결제 및 송금을 할 수 있는 핑잇이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국내에도 당장 페이팔의 진출이 예정돼 있다. 페이팔은 이베이의 자회사인 옥션, G마켓 등에서 외국인의 한국 쇼핑몰 구매 용도로 우선 도입될 예정이다. 이밖에도 8억명에 이르는 애플 아이튠즈 사용자들을 노리는 애플페이도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아마존의 한국 진출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미국 아마존의 직구 시장이 대상일 뿐 국내 직접 진출은 검토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종화 연구원은 “한국의 경우 결제든 송금이든 반드시 카드, 은행 등 금융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비금융 IT 업체가 단독으로 금융업을 영위할 수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전통 금융업 영역에 보호막이 처져 있는 한국시장의 특성 상 은행, 카드 등 전통 금융업체들이 IT 업체들이 주도하는 핀테크 시대의 흐름에 대해 방어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 제휴를 모색하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카카오페이와 라인페이 등 토종 핀테크 서비스의 전망도 아직은 불투명하다. 삼성증권 장효선 연구원은 “한국의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은 게임과 광고 등 일부에 편중이 심해 일반인들의 실생활에 크게 연관되지 않고, 뱅크월렛 카카오의 경우 충전 한도가 50만원으로 제한돼 있는 등 한계가 많다”고 설명했다. 장 연구원은 “특히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규제는 진정한 혁신을 추구함에 있어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알리페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결제를 폭넓게 지원한다. 중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시스템일 수도 있다.
 

장 연구원은 “카카오페이는 기본적으로 카카오톡 모바일 앱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PC 결제에서도 스마트폰의 카카오톡을 실행시켜 인증을 받아야 한다”면서 “ID와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되는 페이팔이나 알리페이 방식의 간편 결제보다 편의성이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NFC 기반의 결제가 지원될 전망인데 역시 가맹점 확보나 NFC 동글 보급 등의 문제로 활성화는 단기간 내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장 연구원은 “아마존이나 페이팔 등은 보안 책임을 기업이 지기 때문에 사용자가 설치할 프로그램이 많지 않은데 우리는 액티브엑스 형태로 사용자가 설치하고 이에 따른 책임도 사용자에게 돌아간다”면서 “우리나라는 기업이 보안 투자 비용을 사용자에게 전가하고 공인인증서만 설치하면 해당 거래에 이상이 생겨도 금융 회사들 책임이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공인인증서가 일종의 ‘면죄부’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장 연구원은 “위어바오의 경우 수익률이 은행 요구불 예금 대비 400bp 이상 높지만, 뱅크월렛 카카오는 수익률이 0%로 오히려 은행이나 증권사 CMA 대비 200bp 이상 낮다”면서 “대부분의 유저들은 최소한의 필요한 돈만 충전시키고 기존에 있던 은행 계좌를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 높다”고 지적했다. 장 연구원은 “카카오가 직접적인 운용사를 설립하는 방안도 가능하겠지만 규제 때문에 실현 가능 여부는 미지수”라고 덧붙였다.

강정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연구원은 “미래창조과학부 등은 핀테크 육성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정작 금융위원회 등 기득권 부처가 움직이지 않고 무엇보다도 청와대에 의지가 없어 한국의 핀테크 시장은 한동안 갈라파고스로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강 연구원은 “한국은 가뜩이나 신용카드 시장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활성화 돼 있기 때문에 핀테크 스타트업들이 뚫고 들어올 틈새 시장을 찾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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