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중순에서 12월 초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모두 정신없이 바쁜 시기다. 진학 업무가 몰리기 때문이다. 중학교는 특목고와 자사고가 요구하는 각종 진학 서식을 갖추느라 정신이 없고, 고등학교는 대학 수시전형이 요구하는 서식을 갖추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생활기록부를 가장 중요한 근거 자료로 요구한다. 덕분에 이 무렵에는 교무행정 시스템(NEIS)이 폭주하는 접속으로 멈춰서기 일쑤다.

그런데 특목고, 자사고, 그리고 대학은 그 학생에 대한 진실한 교육적 정보와 자료를 원해서 생활기록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고등학교, 대학교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스펙’을 확인하는 근거자료로 오직 생활기록부 기재 사항만을 활용한다. 아무리 다양하고 가치있는 활동을 많이 한 학생이라도 그 근거가 생활기록부에 기재되어 있으면 3년간 학교-집 오가며 시험공부만 한 학생이 된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은 학생이라도 독서목록이 생활기록부에 기재되어 있지 않으면 책과는 담 쌓은 학생이 된다.

덕분에 생활기록부에 들어가야 하는 내용은 점점 많아지고, 담임교사들은 입시철이 되면 학생 한 명당 거의 논문 한 편 분량의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느라 쉴 틈이 없다. 여기에 추천서까지 있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교사일수록 추천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기 때문에 거절하기가 어렵다. 2~3주라는 길지 않은 기간동안 생활기록부 기재사항과 추천서들을 모두 마무리 해야 하기 때문에 3학년 학급 담임교사나 교과교사는 그야말로 학교에 언제 왔다 언제 가는지 모를 정도로 수시로 다운되는 컴퓨터와 씨름해야 한다.

물론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을 위해 필요한 서류를 갖춰주는 일은 교사의 중요한 책무이니 바쁘다 해서 투덜거릴 일은 아니다. 정작 교사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일의 양이 아니라 일의 성격이다. 생활기록부가 진실한 교육기록이 아니라 진학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이 문제다. 일단 도구주의가 만연하면 진실은 부차적인 것이 되며, 심지어 위험한 것이 되기도 한다.

교사는 진실을 가르쳐야 하는 존재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진실되게 살라고 가르쳐야지 요령껏 살아라고 가르쳐서는 안된다. 만약 교사가 요령을 가르쳐야 하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모두가 서로를 진실이 아니라 요령의 대상으로 보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이자, 법적으로 교사가 작성하도록 규정된 유일한 공문서인 학생생활기록부는 문자 그대로 진실의 창고가 되어야 한다. 그 속에는 학생에 대한 진실이 기록되어 있어, 이를 참고하면 그 학생에 대한 가장 적절한 교육 방침을 수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게 생활기록부의 원래 존재 의미다. 그래서 오랫동안 생활기록부는 본인과 학부모가 열람할 수 없는 문서였다. 이는 교사가 오직 교육자의 양심과 전문성에 의거해 어떠한 압력도 받지 않고 작성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조선시대때 국왕이라 할지라도 왕조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던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이제는 생활기록부가 진실의 기록이 아니라 학생을 선발하는 도구로 바뀌없다. 여기에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 도입된 ‘소비자가 왕’이라는 ‘교육수요자 중심주의’까지 겹쳤다. 이렇게 되면서 교사에게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일은 학생에 대한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진학을 보다 유리하게 도와주는 서비스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국왕'조차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와 달리 ‘소비자 왕’ 학부모는 생활기록부를 열람할 수 있게 되어버렸다. 학생에게 불리한내용이 한 줄이라도 있으면, 혹은 학생이 대단히 훌륭하게 과장되지 않으면, 혹은 다른 학생보다 내용이 더 적으면, 교사들은 생활기록부를 잘 써달라는 청탁, 압력, 심지어는 협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학생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생활기록부를 진실하게 작성한 교사는 나쁜 교사가 되었고, 학생의 단점을 감추고 장점을 침소봉대하여 상급학교 입학담당자를 솔깃하게 만드는 사람이 좋은 교사가 되었다. 심지어 학생들까지 생활기록부에 어떤 내용을 더 써 달라, 어떤 내용을 꼭 넣어 달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육부까지 여기에 부화뇌동하여 '부정적인 내용을 쓰지 말라', '길고 상세하게 쓰라', ‘민원의 소지가 없게 하라’는 등의 지침을 내려 보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좋은말을 많이 썼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단 한 줄을 쓰더라도 정확한 진실을 쓰는 것인데, 이미 그런 정신은 이 입시의 광풍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학생들이 기록을 다만 목적 달성을 위해 얼마든지 왜곡하고 과장해도 되는 수단으로 여기는 법을 익힌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미 생활기록부가 입시의 필요에 따라 엿가락처럼 이리저리 바뀌고 외화내빈의 포장지로 전락하는 과정을 지켜본 학생들이 성장했을 때, 공적 기록에 의거하여 움직여야 하는 우리 사회가 과연 제대로 유지될수 있을까? IMF 당시에도 ‘한국병’으로 지목되었던 것 중 하나가 ‘공적 기록’이 ‘진실’을 닮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생활기록부 바늘도둑이 국가회계 소도둑 되는 법이다. 특목고, 자사고, 그리고 수시전형을 실시하는 대학들은 생활기록부의 객관적인 정량지표만을 입시자료로 활용해야 한다. 교사가 내밀하게 기록한 내용들은 오직 교육적 목적에서 참고만 할뿐, 이를 입시 줄 세우기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현실은 생활기록부, 교사 추천서가 진실한 기록이 아니라 특목고, 자사고, 대학교 입학담당자를 유혹하는 낚시 떡밥 역할을 하고 있는 추악한 모습이다. 우리는 IMF 이후 17년 동안 무엇을 배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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