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8일로 서울형 혁신학교 1기가 마무리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 혁신학교에 대한 평가와 전망도 분분하다. 혁신학교의 성과를 과장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하겠고, 또 필요하면 엄격한 비판과 재평가도 필요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어려운 상황 속에 열정과 헌신으로 혁신학교를 여기까지 끌고 온 교육 주체들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혁신학교에 대한 보수와 진보의 평가들은 모두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먼저 보수쪽을 보자. 보수진영에서 내던지는 혁신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전교조 학교”, “좌파 학교”, “종북 양성소”라는 극단적인 언어 폭력들 아니면 “돈 받으면 누가 못해?” 같은 식의 냉소였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사실과 다르다. 혁신학교들 중 전교조 교사가 전체의 1/3 이상인 학교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 전교조가 혁신학교를 자신들의 핵심 정책으로 내건 적도 없거니와, 혁신학교 활동에 열심인 교사들 중, 전교조 핵심 활동가나 간부 출신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전교조 본부나 지부에 혁신학교 담당 전임자가 배치된 것도 2013년의 일이며, 그나마 이번 11월 3일자로 모두 학교로 복귀되었다.

예산 지원만 받으면 혁신학교 같은 활동을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주장도 음해다. 그 동안 학교에서의 다양한 교육혁신 시도가 좌절한 까닭은 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교사들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억누르는 교장, 교감, 그리고 교육청의 관료적 간섭 때문이었다. 사실 예산 지원이 있다고는 해도 혁신학교 교사들은 단 돈 만원의 보상도, 어떤 승진과 인사상의 이익도 받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교육철학과 포부를 관료적 간섭 없이 펼칠 수 있다는 기쁨만이 유일한 보상이다. 예산지원은 부차적인 문제이며, 인천의 경우와 같이 보수적인 시의회가 예산지원을 전액 삭감해도 꺼지지 않는 것이 혁신학교를 만들겠다는 열망이다.

그래서 혁신학교를 꿈꾸는 교사들은 보수 쪽의 부당한 비난에 대해서는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다. 정작 그들을 아프게 만드는 것은 이른바 진보 쪽에서 찔러오는 비수다. 그런 점에서 한겨레신문이 게재한 “혁신학교는 답이 아니다.”(원문보기)라는 칼럼은 매우 뼈아프다. 이 칼럼의 요지는 "이미 학교라는 체제 안에서 어떤 변화를 꾀하기 어렵다. 혁신학교도 결국 학교 체제 너머를 상상하지 못한 실천이니 만큼 답이 되기 어렵다. 한 마디로 이 교육체제 자체를 바꿔야 하는데, 마치 체제 안에서 뭐가 될 것 같은 희망고문에 불과하다. 진짜 혁신은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정도가 되겠다. 그리고 이는 실제 우리나라 진보진영의 관점을 상당히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혁신학교 교사들이 학교체제 너머를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일면적이다. 이는 마치 장애인 급식을 지원하는 활동가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체제 자체의 문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혁신학교에서 애쓰는 교사들은 체제 전체의 혁신을 고민하는 진보활동가들 못지않게 체제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설사 학교 안에서 뭔가 바꿀 수 있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혁신학교 활동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체제 전체의 문제까지 시야를 넓힐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런 ‘희망고문’에 매달리는 까닭은 장기적으로 교육체제가 바뀌기를 기다리거나 핑계대기에는 당장 눈앞의 아이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의 교육체제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자신의 타성을 합리화하지도 않았고, 교육체제를 바꾸는 일을 해야 한다며 사실상 학교 밖으로 도망가 버리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용맹하게 전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런 용기와 헌신은 그 결과가 아무리 희망고문에 불과할지라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더구나 현 체제 너머에 대한 상상력은 그저 멀리 바라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고, 알량하고 편협한 사회과학 책들을 독파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상상력은 먼저 문제에 직면하고, 그 문제 속에서 직접 부딪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교육체제 너머를 상상하려면 먼저 교육체제 안에서 뼈아프게 부딪치고 수없이 실패해야 한다. 그 속에서 상상력이 발휘된다. 더구나 그 상상력의 결과는 현 교육체제와 무관한 완전한 어떤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육체제 안에서의 다양한 덧붙임과 재구조화 과정 속에서 발휘된다. 이는 생물이나 사회의 진화과정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물론 한겨레 칼럼이 주장하는 “민사고와 하버드를 향한 트랙에서 빠져나와 곧장 미용사가 될 길을 열어주는 것이 진짜 혁신” 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진짜 혁신의 길은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 마침내 거대한 세력을 이룰 때 열린다. 그럼 그 사람들이 어디서 나올까? 교육을 통해 나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교육은 근본적으로 사회가 바뀐 다음의 교육이 아니라(그때는 이미 그런 교육이 필요 없으니) 한계가 많은 지금의 교육체제 안에서의 교육이라야 한다. 그래서 더더욱 혁신학교가 필요하다. 혁신학교는 학생들에게 이 체제 안에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고문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제를 직시하고 성찰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능력을 기르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칼럼의 지은이는 “현 교육체제 안에서 그런 교육이 가능하겠느냐?”라고 반문할 것이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학교에 남아 분투하면 될 일이고,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학교를 떠나 학교 밖에서 활동하면 될 일이다” 정도가 되겠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학교에 남은 사람들의 분투를 교육 불가능성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헛수고로 여기고 계몽할 권리는 없다.

물론 이 칼럼의 지은이가 혁신학교 교사들의 헌신적인 실천을 조롱하거나 폄하하려고 그런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오해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부 교육청에서 혁신학교가 무슨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광고하는 경향이 있었고, 대입 실적이니 아파트 값이니 하면서 엉뚱한 자랑을 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엉뚱한 자랑을 저지른 쪽은 일부 교육감의 홍보실이었지 혁신학교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런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혁신학교 활동가들은 진보교육감들이 자행하는 혁신학교에 대한 과장된 광고를 경계하고 때로는 비판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의 ‘근본적인 혁신’을 위해 분투하는 진보활동가들 역시 혁신학교와 같은 ‘자잘한 혁신’에 매달리는 교육자들이 ‘근본’을 모르리라 지레 짐작하고 계몽하려 들지 말고 자신들의 일에나 매진하기 바란다. 결국 그들의 ‘근본적인 혁신’의 밑천은 ‘근본’을 모르는 순박한 교육자들의 묵묵하고 작은 실천들에 있을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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