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역사교과서 문제가 국정교과서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 채택율 0%대라는 성적표를 받아든 이른바 보수진영은 자신들이 자랑스레 내어놓은 교과서의 "교과서로서의 질"은 돌아보지 않고, 나머지 8종 교과서를 모두 좌파 교과서로, 일선 학교의 역사 교사들을 모두 좌편향 교사로(전교조 교사의 비율은 15%를 넘지 않으니 전교조만의 힘으로 교과서를 채택할 수 없다)몰아세우는 적반하장을 시전했다. 거기에 발이라도 맞추듯 교육부는 교사들의 교과서 선정권한을 박탈하고 이를 학교운영위원회로 넘기는 지침을 내려 보냈다. 학교운영위원회는 대부분 학부모와 지역위원이 다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학교장 멋대로 교과서를 선정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서 역사교과서와 사회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퇴행시키려는 시도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 한국사와 이른바 문리과 통합교육과정 개정을 통해 사실상 사회과가 수능 필수과목이 되는 상황에서 이는 더욱 의심과 우려를 자아내는 행태다. 교육부 장관은 갈등과 혼란이 많아서 통일된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역사적으로 이미 독재정권으로 판정이 끝난 이승만 정권 시절의 역사교육을 선례랍시고 제시했다. 문리과 통합, 융합교육 등등의 화려한 교육학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교육 말고 다른 저의를 의심하는 것이 결코 기우는 아닐 것이다.

   
역사 교과서. KBS 방송화면 캡처.
 

물론 이른바 선진국들 중 자국 역사, 자민족 역사를 강조하고 이를 공교육을 통해 강제하려 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이들 나라는 대부분 오랜 시간 통일된 나라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전쟁을 통해 통일된 나라들이다. 독일은 “철혈정책”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프로이센이라는 대국이 다른 소국들을 합병하고, 다른 대국인 오스트리아를 무력으로 배제시킴으로써 탄생한 나라다. 이탈리아 역시 북쪽의 사르데냐 왕국이 다른 소국과 교황령을 합병한 상태에서 남쪽의 가리발디가 양보함으로써 탄생한 나라다. 일본 역시 막부파와 유신파의 내전, 그리고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간신히 근대국가의 꼴을 갖춘 나라다.

당시 이탈리아 정치가인 마시모 다젤리오가 “우리는 이탈리아를 만들었다. 이제는 이탈리아인을 만들어야 할 차례다.”라고 한 말이 보여주듯 이들 나라는 '독일인' 혹은 ‘이탈리아인’,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내어야만 국민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었고, 이를 공교육을 통해 이루려 하였다. 하지만 이들 나라 중 지금 자국역사의 교육을 국정교과서로 강제하는 나라는 없다. 국가가 강제로 주입하는 정체성에 기반한 나라는 결국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파시즘에 사로잡혀 자국민은 물론 인류에게 큰 죄악을 저지르게 됨을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반면 수많은 민족들로 구성된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나라는 그러한 강제적인 정체성을 포기하고 다양성에 대한 관용과 인정을 통해 더 강력한 통합을 이루어내었다. 미국인들의 정체성이 인종차별 반대운동가인 킹 목사를 통해 오히려 강화되고, 오스트레일리아인의 정체성이 이른바 백호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더 튼튼해지고 있 것다.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민족 정체성 확립이 문제가 될 정도로 분열이나 내전의 역사를 겪은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외침을 많이 겪었다. 외부 세력의 침입은 내부적으로 단결과 정체성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옴은 사회학 개론서에도 나오는 얘기다. 우리나라의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멀쩡한 군인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집단 괴롭힘에서 보여주듯 개인에 대한 집단의 폭력이 문제가 되는 나라다. 우리나라 교육에 부족한 것은 개성과 자율이지 결코 정체성과 단합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역사와 사회교육을 직접 관장하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단 하나의 표준만을 강요하겠다고 나선다면 이는 교육적 배려가 아니라 역사교육, 사회교육 내용 중 현재 집권층의 뜻에 거스르는 내용이 있다는 정치적 공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은 교육의 전문성, 자주성,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고 있다. 어떤 내용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은 교육전문성에 의해 판단될 일이지 그 내용이 특정 정파에 대한 유불리로 정해질 일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정치적 중립성이다. 실제로 독일의 역사교육은 철저하게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이를 잊지 않도록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물론 이는 우파보다는 좌파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독일의 그 어떤 우파정부도 이를 자학사관이니 좌편향역사교육이니 하며 간섭하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도 노예제도의 역사, 그리고 60년대 인종차별 철폐운동의 역사를 감추지 않고 철저하게 가르친다. 그렇다고 미국 공화당이 이를 민주당에 유리한 좌편향 교육이라고 비난한단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게 바로 선진국이며, 선진교육이다. 교육부장관은 러시아, 베트남, 필리핀, 그리고 북한 따라하려 들지 말고 선진국을 보고 좀 배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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