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과 1989년에 각각 한국을 방문했다. 처음 방문은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으로 한국 천주교회 제2기 순교자 103위 시성을 위한 것이었고, 1989년 세계성체대회에 대회장 자격으로 방한한 것이 두 번째다. 그리고 30년 후인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최근의 참극으로 여러분이 받은 깊은 상처를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특히 광주 시민들은 그 상처를 극복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바로 그러기에 화해의 은총이 여러분들에게 내려질 것입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광주에서 '화해'를 주제로 미사를 열고 이 같이 말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경향잡지> 1984년 5월호에 따르면 당시 교황은 증오의 한 가운데서 화해와 평화의 도구, 해방의 도구, 참다운 자유의 표지가 되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자고 호소했다. 이는 돌발적인 방문이었다. 당시 이는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게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어 5월 5일 교황은 부산에서 노동자, 농어민과의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무관심과 오해, 시달림 앞에서 동료 노동자 농민의 권익 신장을 위해 의식적으로 투신해 온 그리스도인 여러분은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십자가를 져왔다”며 “우리 모두 형제애로써 힘을 합쳐 보다 정의로운 부의 분배를 이룩해야 한다”고 말했다.

   
▲ 지난 84년 10월 5일 소록도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환영하는 나환자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 연합뉴스
 

마지막 방한 일정에서도 교황의 ‘파격’ 행보는 계속됐다.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젊은이와의 만남’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감옥에 투옥됐던 한 학생의 선물을 기꺼이 받았다. 투옥 당시 자신의 양말을 푼 실로 한 올 한 올 엮은 십자가였다. 또 그는 또 다른 학생이 ‘군사독재 정권의 실상을 알리겠다’면서 들고 온 최루탄 상자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다. 방한 이튿날 광주를 찾은 교황은 금남로를 통과해서 미사 현장으로 이동하고 싶어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정부의 통제로 이는 이뤄지지 못 했다. 또 5월 6일 ‘젊은이와의 만남’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경향잡지> 1984년 5월호에 따르면 질문 순서에서 예정 없이 ‘노조 결정 노동자들의 블랙리스트 사건과 대학생 강제 징집’에 대해 질문한 한 청년은 교황 퇴장 후 사복 경찰들에게 연행됐다.

이는 교황의 방한 준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황의 방한 일정을 준비하는 한 축이 정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당시 신군부 정권이 교황 방한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있던 청와대를 방문한 것이 대표적으로 비판받는 행보다. ‘독재의 상징’이었던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시성 미사 역시 ‘그들만의 잔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반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장 소외받는 대중들과 좀 더 거리를 좁힌 행보를 좁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로 호명되는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 용산참사 유가족,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세월호 유가족들을 가까이서 만났다. 특히 세월호 유가족과는 방한 일정 4박 5일 중 다섯 번을 만났다. 세월호 유가족은 이 같은 교황의 행보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인국 신부는 스킨십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김 신부는 19일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1980년대 한국사회 분위기의 문제도 있고 해서 교황과 대중의 거리가 가깝지 않았다. 교황의 광주 미사 등도 통제를 했거나 굉장히 단속을 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번 방한은 정부의 통제가 먹히지 않았으며 교황은 소외받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어루만져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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