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광화문 광장)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까만 봉지 같은 거 들고 지나가잖아요. 그것만 봐도 죽겠어. 아무거나 다 먹고 싶어 죽겠다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요.” 얼굴을 까맣게 그을린 김영오(50)씨가 애써 너스레를 떨었다. 며칠 째 깎지 못한 수염은 거뭇거뭇했다. 세월호 유가족 단식 4일째인 17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김씨를 만났다.

애초 가족들의 계획에 광화문 단식 농성은 없었다. 김씨가 광화문으로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광화문은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에게 호소하는 장소 아니냐”며 “광화문에서 해야 대통령이 우리 모습을 보고 ‘저 사람 살려야겠구나’ 싶어서 특별법을 통과시켜주지 않겠냐”고 말했다. 현재 가족들은 특별법 통과를 요구하며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

국민들이 보기에 다 같은 특별법이지만 가족들이 느끼는 온도차는 크다. 가족들은 성역없는 진상규명을 위해 수사권·기소권을 요구하고 있다. 조사권 만으로는 제대로 된 규명이 어렵다는 게 가족들의 주장이다. 그는 “서해페리호 등 큰 재난사건이 왜 진상규명이 안 된 줄 알아요? 조사권만 가지고 있어서 그래요”라고 말했다.

   
▲ 단식 농성중인 2학년 10반 유민 학생 아버지 김영오씨를 17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만났다. 사진=박준수 제공
 
왜 죽었는지, 왜 죽어야만 했는지…가족들이 끈질기게 던지는 질문이다. 김씨도 딸 유민이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반드시 알아야겠다고 말했다. 사고 8일째가 되던 날 팽목항에서 만난 딸은 마치 살아있는 듯 했다. “너무 깨끗했어. 물에 8일을 있었는데 불지도 않고, 만지니 손이 부들부들해. 산 사람하고 똑같아. 오랫동안 살아있었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지.”

그는 부검까지 고민했다. 익사인지 저체온증으로 인한 죽음인지 알고 싶었으나 딸을 두 번 죽인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애교 많던 딸의 몸에 차마 칼을 댈 수 없었다고 했다. “고등학생쯤 되면 보통 아빠랑 멀어지잖아. 그런데 우리 유민이는 나를 뒤에서 꼭 끌어안고 그랬어요. 삼겹살 구워서 내 입에 넣어주고. 전에는 자다 일어났는데 유민이가 내 팔을 베고 자고 있더라고.”

그는 수학여행 가기 직전 아이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다고도 했다. 딸과의 약속을 깬 그날, 김씨는 특근을 했다. 이혼 후 아이와 따로 살던 김씨는 딸이 수학여행을 가는 것도 몰랐다. “내가 용돈 줄까봐 말을 안 한거야. 그렇게 착해요. 유민이가 2만 9000원짜리 휴대전화 요금제를 썼거든. 그런데 그것도 최하치로 바꿔달래. 아빠 돈 벌려면 힘들다고.”

“내가 왜 굶고 싸우는지 알겠죠? 이혼해서 살다보니 애한테 해준 게 너무 없어요. 해주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해줄 수가 없고. 그래서 내가 목숨 걸고 단식하는 거야. 굶어서 쓰러지는 거, 유민이한테 못 해준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차라리 못된 딸이었으면 이렇게 아프진 않았을텐데.” 이날 오후 단식중이던 가족 두 명이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됐다.

   
▲ 단식 농성중인 2학년 10반 유민 학생 아버지 김영오씨를 17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만났다. 사진=박준수 제공
 
   
▲ 단식 농성중인 2학년 10반 유민 학생 아버지 김영오씨를 17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만났다. 사진=박준수 제공
 
가족들은 특별법이 통과되지 않는 이유로 새누리당을 꼽았다. 새누리당은 가족들이 요구하는 수사권, 기소권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 안에는 수사권까지만 포함돼 있다. 김씨는 “수사권, 기소권을 포함시켜 주면 대한민국, 난리날꺼예요. 관피아, 해피아 높은 사람들 모가지 착착 다 날아간다”면서 “그게 두렵기 때문에 새누리당에서 통과를 안 시켜주는 걸로 밖에 안 보인다”고 말했다.

가족들에게 보상, 의사자, 특례입학 등은 크게 중요치 않다. 실제 피해자 전원 의사자 선정과 관련해 새정치연합은 찬성, 새누리당은 반대지만 가족들은 공식입장이 없다. 대학 정원 외 특례 입학과 관련해서도 여야는 모두 찬성했지만 가족들의 안에는 특례입학 요구가 없다. 김씨는 “그런데 새누리당은 그런 것만 부각시키고 있어요. 우리를 계속 깎아내리고 있다”고 분노했다.

세월호 100일, 그는 생업은 아예 포기하고 광화문 광장에 있다. “이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가만히 있으면 정부가 다 해주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배지 단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들 자리 지킬까만 생각하는 거 같아. 우리가 너무 순진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팽목에 있을 때 증거라도 많이 수집해둘걸. 그것도 너무 후회돼요.”

100일간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면 아이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어느덧 세월호 속에서 울부짖는 아이가 떠오른다 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애써 ‘정신줄’을 잡는다. 그는 마지막으로 딸에게 하고픈 말을 전했다. “유민아, 못해줘서 너무 미안하고 그래도 아빠가 제일 많이 사랑했었고. 아빠가 죽거든 꼭 유민이한테 갈 거야. 다음생에는 우리 네 식구 다시 한 번 행복하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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