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저는 올해 들어서 장래희망이 바뀌었습니다. 원래 장래희망이 바로 여러분들과 같은 일을 직업 삼는 기자였거든요. 저의 꿈이 바뀌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러분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양심과 신념을 뒤로 한 채 가만히 있어도 죽을 만큼 힘든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 그리고 애타게 기다리는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큰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안산 단원고 3학년 학생이 기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는 정운선 경북대 의대 교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편지는 “To. 대한민국의 직업병에 걸린 기자분들께”로 시작하고 있었다. 이는 24일 오전 단원고 3학년을 대상으로 진행된 심리치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성된 것이다. 정 교수는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난 16일부터 안산에서 학생과 학부모의 심리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정 교수는 24일 낮 단원고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아이들에게 카드쓰기를 시켰는데 생존자 아이들에게 전달해달라는 것도 있고, 실종된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도 있었다”며 “그리고 기자들에게 전달해 달라는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에게 이 카드를 기자들에게 전달하겠다고 했는데 그걸 읽어드릴까 한다. 괜찮냐”고 물었다. 이에 기자들은 “읽어달라”고 했고 담담한 표정으로 편지 내용을 들었다.

‘기자를 꿈꾸었다던’ 단원고 3학년 학생은 “이렇게 기자분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께 전하고 싶은 말들과 제가 직접 보고 들으며 느낀 점에 대해 몇 글자 간략히 적어보려고 한다”라며 “사실 저는 올해 들어서 장래희망이 바뀌었습니다. 원래 장래희망이 바로 여러분과 같은 일을 직업 삼는 기자였다”고 썼다.

   
24일 단원고 첫 등하교 길에 정문에 나붙은 안내문. 사진=이하늬 기자
 
그는 이어 “기자는 가장 먼저 특보를 입수해내고 국민에게 알려주는 게 의무”라며 “하지만 그저 업적을 쌓아 공적을 올리기 위해서만 앞뒤 물불 가리지 않고 일에만 집중하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며 정말 부끄럽고, 경멸스럽고 마지막으로 안타까웠다”고 편지에 썼다. 편지를 읽은 정 교수는 “기자들은 (학생들이) 궁금하실거다”라며 “하지만 저희는 되도록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며 기자들에게 취재 자제를 요청했다.

단원고 관계자도 “(기자회견이 끝나면) 학생들이 하교를 할텐데 학생들을 멀리서 촬영하는 것은 괜찮지만 인터뷰는 자제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한 학생이 무심코 인터뷰를 했는데 실명이 거론되고 TV에 나오면서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갔다”며 “인터뷰를 하더라도 TV에 나가는 사실 등 모든 것을 밝혀야 한다. 학생들이 힘들어한다”고 강조했다.

기자들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자회견 직후 학생들이 하교를 시작했지만 무리한 취재를 시도하거나 가까이서 사진, 영상을 촬영하는 기자는 없었다. 학교 측의 요청에 따라 기자들은 모두 단원고 건너편 도로에서 스케치만 했다. 한 기자는 “이 정도면 기자들이 굉장히 자제를 하는 것”이라며 “다른 현장에 가보면 난리도 아니”라고 말했다.

편지 내용에 대해 경제지 소속 A기자는 “세월호 사건이 기자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버려놨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인터넷 매체 B기자는 “너무 미안하다. 기자라서 부끄럽다”며 학생들이 얼굴을 가리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학생들이 고개 숙이지 말고 당당하게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터넷 매체 C기자는 “학생들에게 충격을 안 주기 위해 주의하면서 취재 중이지만 아예 취재를 안 할 수도 없어 힘들다”며 “희생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사회가 기억하게 하고 싶은 마음인데 학생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 단원고 3학년 학생들은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처음으로 등교해 심리 치유 수업 등을 진행했다. 정 교수는 학생들의 상태에 대해 “아이들은 (세월호가) 바다에 떠 있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어른들이 ‘못 구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며 “어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프로그램에는 장례 등 추모행사로 참여하지 못한 학생 25명을 제외한 480명이 참가했다.

그러면서 정 교수는 교사들의 심리 치유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아이들은 교사가 괜찮은지를 가장 궁금해한다”며 “교사가 괜찮으면 아이들도 괜찮아 보이고, 교사가 힘들면 아이들도 힘들어한다. 교사를 빨리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학미 3학년 부장교사는 “등교길에 교사들이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인사를 했다”며 “아이들이 오히려 교사들의 건강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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