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부터 2017년 3월까지 MBC를 이끌 차기 사장으로 안광한 전 MBC부사장이 결정됐다. MBC 사장으로서 그의 등장은 MBC 구성원들에게 다시금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노사 모두 극복해야 할, ‘김재철’이란 트라우마다.

김재철씨가 MBC 대표이사직을 맡았던 3년 동안 MBC의 신뢰도·영향력·뉴스시청률은 추락했고 시사프로그램은 무력화됐다. 능력 있는 동료들은 해고를 당하거나 비제작부서로 밀려났다. 대신 한직에 있던 인사들이 여러 요직을 맡았다. 그들의 비상식적 조직운영에 견디다 못해 정신과 치료를 받은 PD도 있었다.

김재철 사장 경영방식을 견디기 어려웠던 간판 아나운서와 PD는 회사를 옮기거나 그만두었다. MBC의 상징과 같았던 손석희 전 아나운서 국장도 <시선집중>을 떠났다. 모두 김재철 사장 이후 벌어진 일이다.

안광한 MBC 신임 사장의 등장은 MBC 구성원에게 ‘김재철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한다. 김종국 현 사장은 김재철 체제의 수혜자였지만 지역사 사장을 하며 중앙(서울MBC)무대에 있지는 않았다. 반면 안광한 신임 사장은 김재철 체제에서 편성본부장과 부사장을 거치며 중앙무대 최측근의 자리를 지켰다. 그는 2012년 170일 파업 당시 인사위원장으로서 후배들에게 해고·정직 등 중징계를 휘둘렀던 인물로 알려졌다. MBC구성원에게 안광한의 등장은 ‘김재철의 재림’과 다를 바 없다.

   
▲ 2012년 11월 16일 국회 환노위에서 열린 MBC 장기파업 관련 청문회에 증인으로 채택된 김재철 사장·안광한 부사장·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이진숙 기획홍보본부장이 참석하지 않은 모습. ⓒ이치열 기자
 
2012년 11월 1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열린 MBC 장기파업 관련 청문회에 증인으로 채택된 경영진은 김재철 사장·안광한 부사장·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이진숙 기획홍보본부장이었다. 네 사람 모두 증인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이들은 ‘김재철 프레임’, 다시 말해 정부여당과 거대자본의 입장만 대변하는 불공정방송의 핵심인물들이었다. 방송계 안팎에선 이명박정부가 공영방송 황폐화의 주범이라면 이들은 적극적 공범자였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네 사람 중 한 사람은 고인이 되었고(최필립) 다른 한 사람은 사천시장에 출마한다(김재철)고 밝혔다. 이번 사장 공모에 지원이 가능한 이는 두 명뿐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최종면접에 올랐고, 둘 중 연장자에 해당하는 안광한씨가 차기 사장으로 선임됐다. 이명박정부의 언론장악 기조를 박근혜정부가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이번 공모에서 숨김없이 드러난 것이다. 이진숙씨가 최종투표에서 0표를 받았지만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언론계는 물론 언론시민운동진영은 격하게 반발했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21일 논평을 내어 “안광한은 법원이 인정한 정당한 파업을 불법으로 간주해 MBC구성원과 시청자의 권익을 훼손한 책임을 져야 할 인물”이라며 “MBC를 망가뜨린 장본인을 사장에 임명한 방문진 이사들은 즉각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김재철 체제가 부당 해고한 최승호 MBC PD(현 뉴스타파 앵커)는 21일 안광한 신임 사장을 향해 “<4대강 수심 6미터의 비밀>을 불방 시키는데 총대를 메기도 했다. 그 공인지 김재철이 부사장으로 발탁하자 인사위원장으로서 후배 사원들을 많이도 목 자르고 팔 다리 잘랐다. 그 백정노릇이 법원에서 징계무효, 해고무효로 심판당하는 상황인데 꾸역꾸역 한 번 제대로 해먹겠다고 MBC에 다시 입성했다. 참 기막힌 현실이다”라고 개탄했다.

김재철 사장은 재임 시절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회로부터 네 번의 해임안이 상정된 끝에 물러났다. 그런데 ‘김종국’이라는 1년짜리 징검다리를 건너자마자 ‘도로 김재철’이 눈앞에 등장했다. 침묵과 인내로 버티기에는 3년이란 시간이 버겁다.

안광한 신임 사장은 김재철 사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다. 김재철 사장은 MBC 대주주인 방문진 이사회와 사전협의 없이 지역 계열사 및 자회사 임원 내정자 20여명의 명단을 전격 발표했다가 이에 발끈한 여당 추천 이사들에 의해 낙마했다. 이를 지켜본 안광한이 같은 실수를 할리 없다. 정부여당의 입김이 작용하는 방문진 이사회의 요구를 충실히 따를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김재철 사장 시절의 일방적인 인사전횡과 시사프로그램 탄압, 능력 있는 구성원에 대한 정치적인 배척, 조직을 파업과 비파업자로 구분하는 정파적 경영이 반복된다면 MBC 구성원은 또 다시 ‘선택’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김재철 체제 극복 못하면 MBC는 공영방송 지위도 위태롭다 

   
▲ 안광한 신임 MBC 사장. ⓒ이치열 기자
 
사실 김재철 체제 극복의 문제는 비단 MBC 평기자·평PD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경영진 역시 MBC의 경쟁력을 과거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선 김재철 시대의 과오를 되돌아봐야 한다. 김재철 사장의 입김이 덜했던 예능과 드라마가 건재하고 입김이 강했던 시사교양과 보도가 추락한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다.

안광한 사장의 취임은 MBC 구성원들의 투쟁의식 또한 다시 깨울 것으로 보인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본부장 이성주·MBC본부)는 21일 성명을 내고 “지금 MBC는 신뢰도 추락, 시청률 하락, 인재 유출이라는 3중고를 겪고 있다. 50년 역사의 MBC,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던 MBC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며 안광한 신임 사장을 향해 “김재철 시대의 인사권·경영권 남용, 미친 칼춤이 재연된다면 안광한은 김재철과 똑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성주 MBC본부장은 파업도 불사할 것이라 밝혔다.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김재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MBC를 정상화시키기 위한 MBC구성원 스스로를 위한 선택이다. MBC 구성원들은 2012년 170일만 싸운 게 아니다. 이명박 정부 5년 내내 언론노조의 가장 앞에서 싸웠다. 2013년에는 어찌됐든 김재철 사장이 물러났다. MBC 구성원들에게도 쉬어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필요했다. 이제 다시 MBC본부도 싸울 채비를 하고 있다.

최승호 PD는 MBC에 남아있는 동료 후배들을 향해 “MBC의 동지들이여, 기죽지 마라. 일어서서 싸워라. 이런 자가 3년 더 MBC를 말아먹으면 과연 국민의 재산이자 여러분의 일터인 MBC가 남아나겠나? 한 사람 한 사람 자기가 할 수 있는 싸움을 해야 한다. 절망은 사치스럽다. 일어서서 싸워라”라며 투쟁을 당부했다.

만약 안광한 신임 사장이 회사 경쟁력을 강화하고 170일 파업과 같은 파국을 막고자 한다면 MBC에서 ‘김재철 트라우마’를 없애야 한다. 법원 판결에 맞게 해직언론인을 전원 복직시키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배치해야 한다. 노조활동에 따른 불이익을 줘선 안 되고 공정방송위원회를 통해 공정보도를 견인해야 한다. 모두 과거에 MBC가 했던 일이다.

   
▲ 2월 21일자 MBC '뉴스데스크'.
 
새 사장이 선임된 시점에서 MBC의 르네상스(재생 혹은 부흥)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JTBC와 TV조선, KBS와 SBS 사이에서 무색무취한 방송, ‘안 봐도 좋은 친구 MBC 문화방송’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MBC는 공영방송으로서의 지위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

신경민 민주당 최고위원은 21일 폴리뉴스와 인터뷰에서 “이진숙이 대선 직전에 최필립 이사장과 논의해서 MBC 민영화를 하려고 했던 것을 안광한이 하려고 할 것”이라 주장했다. 안광한 신임 사장은 21일 면접 자리에서 민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MBC 민영화는 일반 공기업 민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논의일뿐더러 현실화되려면 복잡한 과정들이 필요해 현실가능성은 떨어진다.

그러나 불공정방송이 계속되며 ‘공영방송 무용론’이 확산된 시점에서 민영화 논의가 등장할 경우 결과를 쉽게 예단할 수 없다. 결국 공영방송 MBC를 지키고 싶다면, 노사 모두 ‘김재철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나서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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