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전문가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 연대' 정책국장의 갑작스런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특히 그 죽음의 형식이 자진(自盡)이라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살고 죽는 게 하늘의 이치이긴 하겠지만, 박상표 국장의 자진은 새삼 사람 답게 사는 것의 어려움을 실감케 한다. 박 국장의 죽음은 진실의 확보, 정의의 확장을 위해 사는 삶의 고단함, 신산스러움, 핍진함을 보여준다.

2008년 촛불의 도화선 역할을 한 광우병의 위험성과 이를 도외시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문제점을 시민들이 쉽게 이해한 데에는 박 국장의 기여가 절대적이었다. 그 때 얻은 그의 별명이 '촛불의인'이었다. 또한 그는 재야, 비주류의 연구자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담배 회사 내부 문건 속 한국인 과학자 분석'이라는 제목의 논문은 그가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저술한 논문인데, 이 논문은 2012년 11월부터 2013년 9월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레거시 담배문건 도서관에서 ‘ETS(간접흡연), Korea(한국), Consultant(컨설턴트)’를 검색해 수집한 담배문건 2042건을 분석해 이른바 한국인 청부과학자들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한국사회에 대한 공적 공헌과는 달리 그의 개인적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 연대'정책국장직 수행에 집중하느라 경제적으로는 곤궁했고 건강도 나빴다. 어느 사회나 비슷하겠지만 특히 한국사회에서 공익과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실존적 삶은 불우하기 십상이다. 반면 사익추구에만 골몰하는 무리들은 호의호식하다 평안하게 일생을 마치곤 한다. 공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사적 행복을 포기해야 하고, 사익만을 쫓는 자들은 공익을 해치면서 사적으로는 행복해지는 기묘한 역설이 존재하는 것이다.

악인 중의 으뜸이라 할 도척의 행복과 선인 중의 선인이라 할 백이숙제의 불운을 비교하며 '하늘에 천도가 있느냐'고 했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의 한탄은 여전히 유효하다. 박상표 국장의 죽음은 노무현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노무현의 삶도 간난신고의 연속이었다. 노무현이 한국사회가 나아지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와 판단이 엇갈리겠지만, 노무현이 일신의 사(私)가 없는 사람이었고 대의와 공익을 위해 볼꽃처럼 자신을 태웠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균형감각을 현저히 잃은 태도일 것이다.

노무현은 한 마리의 분망한 숫말처럼 이상을 쫓았고, 그 이상을 이룰 수 없음에 절망했고, 비극적 최후로 생을 마감했다. 노무현이 자진하기 얼마 전 봉하사저를 찾은 인사에게 했다는 "절대 정치하지 마라"는 말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한 실존적 인간의 낙담과 허무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비감하기 이를 데 없는 언사다. 정의가 구현되고 확장되는 세상, 인간적 존엄이 철저히 옹호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도 세상은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자신의 실존적 삶은 한없이 불우해질 때 마음이 얼마나 무참하고 참혹할 것인가?

광주가 피의 늪에 빠진 1980년, 눈 밝은 시인은「그날」이라는 시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갈파했다. 시인의 이 말을 정의가 불의에 패배하는 현실, 의인이 핍박당하고 악인이 흥왕하는 현실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시인이 「그날」을 쓴 건 30년 훨씬 전의 일이다.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병든 모두가 아프지 않은 현실은 그닥 변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는 한국사회가 이처럼 병리적일 수 없다. 의인들은 낙엽처럼 지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 시비(是非)에 대한 분별이 흐리고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세상에 인간적 존엄이 자리잡기는 어렵다.

박상표 국장의 죽음은 인간적 존엄이 실종된 한국사회의 병리적 멘털리티를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공적인 분주함으로 충만했으나 사적으로는 고단한 삶을 살았던 박 국장의 죽음은 좋은 세상을 지향하는 이들의 마음을 스산하게 만든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지만, 어떤 죽음은 삶보다 더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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