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가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김진혁 PD를 수학교육팀으로 ‘복귀’시켰다. 사실상 프로그램 제작이 어렵게 된 것이다. EBS 측은 “프로그램 중단 여부는 아직 결정된 게 없다”고 밝혔지만, 근현대사를 다루는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이 ‘수난’을 겪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EBS는 8일 인사 발령을 내어 <다큐프라임-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를 제작하던 김진혁 PD를 수학교육팀으로 복귀시켰다. 앞서 지난 1월15일, EBS는 지난해부터 해당 프로그램을 준비·제작해오던 김 PD를 돌연 수학교육팀으로 발령 낸 바 있다. 논란이 이어지자 EBS는 같은 달 28일 김 PD를 원소속부서인 교육다큐부로 ‘파견’냈다. 그런데 프로그램 제작이 완료되기도 전에 다시 김 PD를 수능 등 교재 제작 부서인 수학교육팀으로 ‘복귀’시킨 것이다.  

   
▲ EBS 사옥
 
 
김진혁 PD가 준비하던 프로그램은 독립유공자 후손들, 그 중에서도 해방 직후인 반민족행위특조사위원회 후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반민특위는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 등을 위해 구성됐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경찰 및 사법부를 장악하고 있던 친일파 등의 견제 속에 강제 해산됐다. 특위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위원들은 ‘간첩’으로 몰려 탄압을 받았다. 
 
김 PD는 지난 1월 인사 발령이 난 직후 “EBS에서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아이템”이라며 “이 정도 이야기도 하지 못하면 조선시대 얘기밖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김진혁 PD는 9일 통화에서 “제작이 70%정도 진행됐는데 중단될 가능성이 높다”며 “방송을 4개월여 앞두고 발령을 내버리니까 황당하다”고 말했다. 
 
EBS 노조(전국언론노조 EBS지부)는 “공영방송사에서 결코 벌어지지 말아야 할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며 인사조치 철회를 요구했다. 노조는 성명을 내어 “방송을 앞두고 한창 제작 중인 담당 PD를 인사발령 한 것은 EBS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라며 “제작이 진행 중인 프로그램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강행한 사장의 무모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라며 “방송 경험이 일천한 무지의 소산인가, 아니면 말 못할 배경이 있는 것인가”라고 지적했다.
 
노조는 “사장은 예전에는 문제가 없었던 이 프로그램이 지금에 와서 문제가 되는 이유에 대해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며 “<다큐프라임-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를 다시 제작케 하라”고 촉구했다. “EBS 사장으로서의 편성의 독립성과 제작의 자율성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임명된신용섭 EBS 사장은 노조에 의해 ‘MB 낙하산’으로 지명된 바 있다.
 
한송희 노조위원장은 통화에서 “(해당 다큐는) 지난해 교육다큐위원회 절차에 의해 선택됐고, 모든 절차를 통과한 작품”이라며 “만약 완성이 됐는데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으면 내부 절차에 따라 수정하거나 해서 방송에 내보내면 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프로그램 제작이 끝나기도 전에 인사를 단행해서 중단시킨 것”이라고 비판한 대목이다.

   
▲ 지난해 11월30일, 첫 출근을 하려던 신용섭 EBS 사장을 노조가 막아서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EBS 홍보사회부 류은지 과장은 9일 통화에서 “수학교육팀의 부서 업무나 인력 사정을 고려해 배치가 된 것”이라며 “프로그램 중단 여부는 아직 결정된 게 없다”고 말했다. 류 과장은 “회사 내부적으로 업무 우선순위가 있을 수 있다”며 “추후에 수학교육팀 업무가 안정화되면 그때 가서 방송 진행 여부나 일자를 확정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프로그램 제작이 중단될 경우,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이미 투입된 제작비와 제작과 관련된 각종 계약들의 파기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내부감사나 국정감사 등에서 문제의 소지가 될 가능성도 있다. EBS 측은 “중단된 거라고 확정 된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지만, 기획 기간이 제작기간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프로그램 특성상 이제 와서 ‘대체 인력’을 투입해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사 발령대로 김 PD가 수학교육팀에 ‘복귀’한다면, 프로그램 제작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김한중 언론노조 정책실장은 “KBS에서도 (근현대사) 다큐를 놓고 논란이 있다”며 “근래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인데, 유사한 패턴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공영방송의 역사 프로그램들을 대상으로 뭔가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라는 설명이다. KBS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대를 조명한 (가제)<그때 그 사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노조와 갈등을 빚고 있다. 
 
한 위원장은 “(제작을 중단하라는) 외압이 있었는지, 자체 판단인지는 모르겠다”면서도 “이건 ‘딜’을 할 문제가 아니다”라며 회사의 이번 인사 조치에 맞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언론노조는 성명을 내어 “작금의 공영방송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방송의 공정성, 독립성, 자율성을 훼손하는 명백한 도발로 간주하고 KBS 길환영 사장과 EBS 신용섭 사장에게 진상규명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언론노조는 “‘코드 개편’에 눈이 먼 공영방송 사장들의 비상식적인 조치가 철회될 때까지 이번 사태를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EBS는 최근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방송되고 있는 <지식채널e>를 4회로 줄이고, <역사채널e>를 신설하려는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한송희 EBS 노조위원장은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 ‘근현대사를 바로 알자’는 취지인데, 역사를 왜곡할 소지가 있는 기획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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