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 사무실에 배우를 인터뷰하러 들어섰다. 인터뷰는 늘 긴장된다. 삼십분 미리 왔으니 숨도 돌리고 차도 한 잔하고, 영화에 대해 미리 스탭들과 인사 좀 나누면 되겠다. 회의실 탁자에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들어서서 저 아무개입니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앉아있던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쓱 손을 내밀며 "아, 아무개씨구나~"하며 받아든다. 가볍게 인사하고 감독에게 먼저 인사나 해야지 싶어 "감독님은요?" 했더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한 사람이 나간다. 다른 한 사람이 "앉으시지요."하며 의자를 빼준다. "아, 네." 앉고보니, 아뿔싸! 바로 이 사람이 오늘 인터뷰할 바로 그 배우다.

그렇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달달한 표어, 광고 마케팅용 문구 말고, '진짜 가족' 그대로의 모습으로 씩 웃는 낯익은 존재감, 박철민. 이 배우를 보겠다고 와놓고, 만나기 전 긴장 좀 풀겠다고 미리 와놓고, 막상 바로 앞에서는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람 무방비 상태로 맞닥뜨리고 마음을 풀게 만드는 사람. 이 편안한 사람이 앞으로 만들어질 영화 티저 포스터에서 보인 표정이 하도 먹먹해서 꼭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딸의 영정 사진을 들고 서있는 택시 기사의 모습.

그리고 그 영화 <또 하나의 가족>은 이런 영화다.
 

"2007년 3월6일 스물한살의 꽃다운 소녀가 백혈병으로 죽었습니다. 소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반도체 회사에서 근무하였습니다. 속초의 택시기사였던 소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병마와 싸울 때 그저 운이 나빠서라고, 대학을 보내지 못한 자신 탓이라고 자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소녀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던 동료언니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딸의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반도체 공장과 딸의 죽음에 어떠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딸이 더이상 백혈병을 버티지 못하고 죽던 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약속을 합니다. 반드시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겠다고 말입니다.

<또 하나의 가족>은 다큐멘터리나 사회고발영화가 아닙니다. 평범한 가족이 거대 기업으로부터 커다란 슬픔을 겪고, 그들과 맞서 싸워가며 <또 하나의 가족>으로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택시기사인 평범한 아버지가 각종 유혹과 협박에 굴하지 않고 결국 세상을 떠난 딸과의 약속을 지켜내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2011년부터 시나리오 작업이 시작되었고 현재 캐스팅, 헌팅등 사전제작작업이 마쳐진 상황입니다. 하지만 현재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대중영화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소재에 투자자를 찾기 힘든 상황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도움을 얻고자 클라우드 펀딩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영화를 사랑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조그마한 변화를 바라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좋은 영화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아버지가 딸과의 약속을 지켜내었듯이 우리도 여러분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인사하며 '클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 종잣돈을 모으려는 제작진, 그리고 기꺼이 자신이 앞장 서서 백짓장 맞들어 달라고 나선 주연배우, 그 아버지, 박철민. 사람좋아 보이는 역에 잘 어울리는 배우인 거야 전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런 영화 출연을 선뜻 결심하고, 심지어 영화가 제작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려 애쓰는 건 사람 좋다고 덜컥 감당할 일은 아니다. 자, 그러니 좀 얘기를 들어봐야겠다.

이안 : 반갑습니다. (좀 전에 못 알아보지 않은 척, 자연스럽게. 그런데 티 나나?)

박철민 : 안녕하세요!

이안 : 잘 아시다시피 글로벌 대기업 반도체 공장이 연관된 문제를 다룬 영화에, 그것도 영화를 끌고 나가야하는 타이틀롤로 출연하시기로 하셨는데, 어떤 마음으로 결정하신 일인지요? 처음 감독이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더라도 과연 출연하겠다는 배우가 있을까 걱정스러웠던 작품인데요.

박철민 :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왜 그렇게 생각 하셨지? 배역이 매력있고, 쉽게 나올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니 어떤 연기자든 이 역을 제의 받는다면 당연히 욕심 낼 역할이라는 생각에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뿐인데? 소박하고 깨끗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룬 아버지, 한집 건너 우리 이웃 어디에나 있음직한 그런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 강철같이 강해지는 모습, 얼마나 대단해요?

<부러진 화살>이나 <남영동 1985>에 출연하신 분들도 제가 잘 알지만 무슨 불이익을 걱정한다거나 연기말고 다른 목적으로 연기를 한 건 아닐 겁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작품 하는 분들이 부럽더라고요. 거기다가 영화를 통해 사회를 정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안 : 혹시 딸이 있으신가요?

박철민 : 둘 있지요. 영화에서 처럼 20대 초반 하나, 또 10대 후반 이렇게요. 집에서 라면 하나 놓고 아웅다웅하고, 서로 질투도 하고, 그러면 야단도 치고, 또 화해도 하고...... 이거 다 저도 경험한 일상이고, 그게 정말, 진짜로 참 행복하거든요. 그런 평범한 가족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겪게 됐을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 얼마나 대단합니까? 내 핏덩어리같은 딸을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읽었고, 그냥 해야겠다 생각했지요.

이안 : 박철민이라는 배우는 <꽃잎>, <스카우트>, <화려한 휴가>처럼 현실문제에 나서는 사회적 이슈가 되는 영화를 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입장이세요?

박철민 :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이 작품도 그렇고, 다른 작품도 그렇고 그저 배우들 다 그렇듯이 캐스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나리오가 들어오고, 역할 제의를 받으면서 경험하지 못한 내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 싶으면 하는 거예요. 함께 작품했던 사람이 다음 영화 이런 거 있는데 한번 봐라 하면서 부른다든가, 예전 작품 연기 눈여겨 봤던 쪽에서 이번에 작품 좀 같이 하자며 시나리오를 보낸다든가 뭐 이런 거죠. 작품 좋고 재미있으면 그냥 하는 거예요. 연기자들은 다 그래요.

이안 : 이전에 <낮은 목소리>나 <전태일>같은 경우처럼 사회적 모금으로 제작을 하는 특별한 영화들이 있었고, 최근 <26년>은 투자가 무산되면서 클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영화제작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런 영화들은 하다하다 안되니까 그런 방식을 선택했지만 <또 하나의 가족>은 아예 처음부터 클라우드 펀딩을 하는데 부담은 안되시나요? 이번 작품 <또 하나의 가족>에서 타이틀 롤로 간판 역할을 하게 되셨는데, 사실 연기자들은 투자배급이 결정되지 않은 영화에 출연하는 게 아주 불안한 입장이잖아요. 출연료, 일정, 앞으로의 계획 등등 여러 면에서요.

박철민 : 저는 이런 기획이 참 바람직하고 더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해요. 클라우드 펀딩에 참여하는 분들은 다 예비관객들 아닙니까? 이렇게 미리 관객이 되실 분들의 호응이 있으면 그 기다리는 관객들을 위해 더 준비도 열심히 하게 되고, 기운도 나게 되고, 그분들 실망시키지 않도록 잘 해야겠다는 다짐도 되고.

그리고 1989년부터 연기 생활하면서 출연료 문제로 못하겠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어디서 불러주면 그게 감사하고, 오히려 작품 없을 때 기다리면서 조바심나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닐까 고민하며 마음 아팠던 기억은 있지요. 일정 때문에 못한 적은 있어도 돈 때문에 좋은 배역 앞에서 망설인 적은 없습니다. 이제 가족들하고 삼겹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정도로는 살아요. 그 정도면 전 만족합니다.

그러고보니 <또 하나의 가족> 때문에 미리 하겠다고 약속했던 다른 연극 하나를 일정이 안 맞아 못하게 된 게 참 미안하고, 그쪽에 실례가 된 것 같아 그게 속상한 건 있었어요.

이안 : 티저 포스터를 보고 가족사진이 아주 그럴 듯해서 깜짝 놀랐어요. 아내 역의 윤유선 씨는 제가 우연히 공연 관람하면서 옆자리에 앉아 실물을 본 적이 있는데 이렇게 예쁜 사람이 다 있구나 했는데 의외로 박철민 씨랑 잘 어울리더라구요?

박철민 : 맞아요. 윤유선 씨가 정말 곱고, 아름답지요. 예전에 윤유선 씨랑 <그라운드 제로>라는 2부작 드라마를 하면서 그때도 우연찮게 저는 택시기사, 윤유선 씨는 국밥집 주인의 여동생 역할을 했는데 서로 참 잘 맞았어요. 그래서 2부작 드라마는 짧다, 다음에 기회 있으면 꼭 한 번 같이 하자고 했었는데 이번 작품 받자마자 바로 추천했지요. 윤유선 씨와 찍은 사진이 가족의 느낌이 난다면 그건 우리가 오랫동안 쌓은 신뢰가 사진에 비친 거겠지요.

이안 : 또 다른 티저 포스터, 그러니까 딸 영정사진 들고 찍은 단독 사진은 보자마자 울컥했어요. 박철민이라는 배우가 익살스러운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한 순간으로 슬픔을 자아내다니요.

박철민 : 그 사진은 이미 티저 포스터 촬영 다 했는데 다시 연락이 온 거예요. 뭔가 좀 부족하다, 동네로 갈 테니 집 앞으로 좀 나와라, 그래서 기사의상 입고 우리 동네에서 아주 간단히 촬영했는데 다들 칭찬해 주시네요. 그 사진 촬영하기 전날 밤에도 아내랑 함께 앉아서 고인이 된 유미씨 동영상 보며 같은 부모 입장에서 참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2주 전에는 아버지 황상기 씨 찾아뵙고서 긍정의 힘, 낙천적 힘을 느꼈어요. 내가 이렇게 포기하지 않고 하면 세상이 더 잘 될 거야, 내일은 더 따뜻해질 거야, 이런 힘이요. 그러니 영화 꼭 잘 해야지요.

슬픔이라… 그래요. 지금까지 제가 했던 배역들과는 많이 다르지요. 지금까지처럼 신나게 터뜨리고 달려왔던 길이 아니라 많이 절제하고, 누르는 연기를 해야할 부분도 있고. 그러나 슬플 때는 슬프고, 심각할 때는 심각하면서도 실제 아버님의 긍정적인 모습을 떠올리면서 ‘경쾌하면서 신나게’ 해보려고 합니다.

이안 :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누구나 알아보는 배우이신데, 스스로를 평가하신다면?

박철민 : 저는 전국노래자랑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전국노래자랑은 프로페셔널 가수 뭐 이런 특별한 인물이 나오는 건 아닌데 동네 아저씨, 삼촌, 오빠가 나오는 무대지요. 어딘가 빈틈이 있고, 실력 모자라고, 하는 건 어설픈데 그 무대를 보다 보면 자글자글 눈물이 나고, 대박 웃음도 터지잖아요. 그렇게 희로애락을 표현하는 연기자가 되는 게 제 꿈입니다.

이안 : <또 하나의 가족>은 이제 클라우드 펀딩을 시작했고, 박철민 씨가 앞장을 섰으니 한 말씀 하신다면요?

박철민 : 영화라는 게 기막힌 상상을 펼쳐 보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 <또 하나의 가족>은 실제 있었던 일을 우리들의 힘으로 만들어 보려는 영화입니다. 일상의 향기가 있고, 가슴에 새길 메시지가 있고, 이런 영화가 주는 즐거움은 또 다른 것이지요. ‘대기업 자본이 투자한 영화’가 아니라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모여 ‘거대 투자자’가 되어주십사 하는 겁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영향을 받게 되니 대기업으로부터 자유로운 작품이 되겠지요. <또 하나의 가족>은 재미가 있고,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는 영화, 영화적 매력이 가득한 영화입니다. 상업영화이면서 단순한 상업적 목적보다 세상을 낫게 하기 위해 한발 한발 내딛고 싶은 영화입니다. 그러니 많이 펀딩에 참여해 주십시오.

대화를 마치고 연락처를 알려주는데 메일 ID가 박철민 자신과 별 상관없어 보이길래 물었다. 이 뜬금없는 숫자며 이름은 뭐냐고.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이 앞의 이름은 딸 이름, 뒤의 숫자는 딸 생일이라고. 딸 이름 앞세우고, 딸 생일을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자기를 아이덴티파이하는 연기자, 이런 사람이 선택한 영화, 그 영화 속에서 보일 아버지의 모습, 정말 보고 싶고, 정말 믿음이 간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