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재건위 판결이 두 개라는 등 박정희 독재정권이 저지른 만행을 부정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발언으로 빚어진 여론의 반감이 23년 전 박근혜 자신의 인터뷰 영상마저 도마에 올렸다.

‘뉴스타파’ 제작진은 지난 15일 새벽 박근혜 후보의 23년 전 인터뷰 동영상과 발언전문을 공개하면서 박 후보의 ‘박정희 시대’와 ‘민주주의’에 대한 적나라한 인식을 드러냈다.

박 후보는 지난 1989년 5월 19일 방송된 MBC <박경재의 시사토론> ‘박근혜씨, 아버지를 말하다’ 편에 출연해 “5·16은 구국의 혁명”, “나라가 없어지는 판에 민주주의 중단시켰다는 말이 나오느냐”, “5000년간 가난한 우리 나라의 가난을 몰아낸 것은 (박정희) 지도력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던 것” 등 황당한 주장을 폈다. 박 후보는 또한 5·16과 유신이 없었다면 5·16을 비판하고 매도하는 사람들과 가족, 이 땅,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느냐며 5·16이 먼저나서 파멸직전에 국가가 구출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5·16이 무혈혁명이었다는 점을 들어 박 후보는 아버지가 인명을 가볍게 볼 분이 아니라고도 했다.

이 같은 박 후보의 인터뷰 발언을 정리한 기사(미디어오늘 15일 인터넷판 <박근혜 “아버지는 인명을 가볍게 보실 분 아니다”>-미디어다음)엔 18일 현재 7700여 개의 댓글이 달리는 등 뜨거운 관심을 낳았다. 이 동영상은 한 시민이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에 기증한 테이프를 우연히 뉴스타파 제작진이 입수한 것이다. 제작진은 오는 21일 밤 인터뷰 내용을 한차례 더 방송할 계획이다.

그런데 박 후보가 38세였던 23년 전 동영상까지 굳이 ‘환생’시켜야 했을까. 제작진은 최근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 후보의 인식을 보면 23년 전 인식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며,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의 민주주의 인식을 검증하려는 언론이 별로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충분한 검증없이 박 후보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을 때 자칫 암흑시대가 오는 것 아니냐는 공포감 때문에 시민들에 알려야겠다고 판단했다고 제작진은 전했다.
 

뉴스타파의 ‘박근혜 동영상’ 편을 제작한 최경영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실위원은 17일 밤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박 후보가 자신의 인혁당 발언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데 왜 문제인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며 “대법원 판결을 무시했다는 것 뿐 아니라 인혁당 사건이 갖고 있는 독재정권의 만행, 국회해산과 민주헌정 중단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최 위원은 “그런데 23년 전 테이프를 보니 그가 과연 민주주의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조차 의심케했다”며 “당시는 38세로 성인으로서 가치관과 신념이 자리잡힌 나이인데,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정황이 없고 아버지 사후 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바꿀 만한 인생의 계기가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말을 빙빙 돌려할 뿐 생각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특히 ‘5000년 가난을 물리친 박정희’ ‘굶어죽는 판에 민주주의란 말이 나오냐’는 박 후보 발언에 대해 최 위원은 “그 말은 민주주의를 하면 경제발전이 불가하며, 경제발전을 하려면 민주주의를 포기해야 한다는 역상관관계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서구 선진국은 다 비정상이란 말인가”라며 “이런 생각은 일제시대부터 박정희까지 주입돼온 위험한 생각이다. 소름이 끼쳤다”고 개탄했다.

23년 전 박근혜 동영상 내용에 시민들의 많은 관심이 나타난 데 대해 최 위원은 “국민들이 더 이상 박정희 시대의 비판을 이념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민주화 직후였던 인터뷰 당시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민주체제와 독재체제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니 박 후보의 이런 오래전 영상에도 반감을 갖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터뷰 내용 중 놀라운 대목에 대해 최 위원은 ‘유신이 잘못이면 그때(아버지 살아생전) 잘못됐다고 얘기했어야지, 임금에 목숨 바칠 각오로 건의해야 했다’는 발언을 들어 “대통령한테 목숨바쳐 건의하란 말이냐. 과연 이것이 말이 되는가”라며 “박 후보에겐 당시 대한민국이 독재왕정이었다는 생각이 박혀있는 것 아닌지 놀라웠다”고 전했다. 또한 ‘아버지가 한반도를 만들어갔고, 한반도가 아버지를 만들었다’는 기고문을 소개한 박 후보의 발언에 대해 최 위원은 “아버지가 곧 국가라는 생각”이라며 “이것이야말로 국가주의를 드러낸 것이다. 이는 ‘대통령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고 우려했다.

제작과정에서의 부담감에 대해 최 위원은 “어떤 트집을 잡고라도 방송못내게 하지 않을까 하는 부담이 있었다”며 “무엇보다 두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보고 있으면 훗날 그가 대통령됐을 때 혹시 암흑시대가 도래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도 생겼다”고 전했다.

제작진은 이런 박 후보의 인식에 대해 언론이 적극적인 검증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점도 우려했다. 최 위원은 “유력 대선후보일수록 언론이 더 검증을 철저히 해야 한다”며 “진행자 박경재씨로부터 공격적으로 질문을 받던 23년 전 박 후보는 부모를 잃은 처지의 자연인이었다. 자연인에게도 이 정도의 질문을 했는데, 공인이고 유력대선후보인 현재의 박근혜에 대해서는 왜 반드시 해야할 질문도 하지 않느냐”고 개탄했다.

최 위원은 “향후 법정 선거기간 다가오면 이를 빌미로 언론이 더 몸사리려 할 것”이라며 “또한 안철수 문재인 단일화에만 온통 관심을 쏟게 될텐데 결국 박 후보 검증은 더욱 요원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언론이 대선후보의 민주적 가치관에 관한 질문도 하지않는다면 존재할 이유가 있느냐”고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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