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밀실에서 일본과 군사정보 협정안을 국무회의까지 통과시키자 친일정권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음에도 국내 지상파 방송사들이 ‘당연하다’거나 ‘장점이 있다’는 등 묘한 양비론을 펼쳐 침략과 전범국가에 대한 역사의식조차 결여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외교통상부 당국자가 27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 국무회의 안건으로 의결돼 일본 쪽 국내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서명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아직 협정 체결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용도 공개하지 않았다. 앞서 김관진 국방장관은 지난달 초 국민여론을 수렴하겠다고 협정체결을 미루겠다고 밝혔었다.

이 때문에 온라인 상에서는 이날 하루 종일 이명박 정권이 친일행태를 드러냈다는 성토의 글이 쏟아졌다. 민주당도 “임기 초부터 친일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이명박 정권”이라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무능력한 대응과, 이명박 정권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던 뉴라이트의 친일 역사관을 볼 때, 임기 말에 노골적으로 친일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 아니냐는 걱정마저 든다”고 대변인 논평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이날 저녁 뉴스에서는 모든 방송사들이 하나같이 미온적인 태도를 드러냈다. 특히 SBS <8뉴스>의 진행자 김성준 앵커는 클로징멘트에서 “일본은 따지고 보면 북한이라는 현존하는 안보위협을 우리와 공유하는 관계”라며 “군사정보 교류하는 게 당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앵커는 “하지만 논란이 많이 생길 수 있는 사안입니다. 여론 수렴했어야 합니다. 필요하면 국민을 먼저 설득했어야 합니다. 또 소통이 부족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한일간 군사정보류가 당연하지만 좀더 소통하라는 주장이다.

KBS도 <뉴스9> 리포트에서 장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KBS는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겠다는 건데 찬반논란이 거세다”라며 “그동안 주한미군의 대북 정보력에 의존해 온 만큼, 정보. 감시 장비에서 앞선 일본의 정보 채널을 확보해 대북 억지력을 강화하는 장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KBS는 협정 추진 과정이 비공개로 추진됐다는 점 등이 문제라면서 협정반대측이 ‘위안부와 강제 징용 등 과거사 문제가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과 군사 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고 모호하게 전하는데 그쳤다.

MBC는 “국무회의에서 비공개로 안건을 처리한 것도 문제고 독도와 위안부 문제 등 국민정서를 고려할 때 시기상조라는 비판”이라면서도 기자의 리포트에서는 정부측의 주장을 상세히 실었다. 특히 새누리당의 논평을 유일하게 반영했다.

MBC는 “국가 안보를 위한 외국과의 군사협정을 괜한 반일 감정 자극에 이용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김영우 새누리당 대변인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의 한일군사정보협정 날치기 체결이 소통과 여론수렴 부재에만 있느냐는 데에 있다. 현 정부가 ‘독도발언’ 의혹을 시작으로 집권 초부터 늘 친일 시비에 휘말려왔다는 점이나, 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이자 군국주의 국가이며 한반도를 두차례나 장기간 불법침략한 국가와 군사협정을 맺는 것이 갖는 반역사성을 지적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심지어 민주당의 논평에 있는 이 정권의 친일행태에 대한 언급의 경우 방송에서는 모두 뺐다.

SBS는 리포트에서는 “일장기와 총칼을 연결지으면 몸서리가 쳐지는 게 우리 국민들 정서다보니 논란이 예상되는데, 정부가 이런 사안을 쉬쉬하면서 처리해서 비난을 자초했다”고 지적하면서 정부의 설명과 함께 ‘한반도 안보체계가 노출되고 불안감만 높이는 짓을 했다’는 민주당 발언을 덧붙였다.

이를 두고 지상파 방송사들이 한일군사협정 문제가 갖는 역사성을 결여한 방송태도를 드러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소통이나 여론수렴 부재 차원의 문제를 뛰어넘는 역사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는 지적이다.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은 28일 오전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국민동의 없이 몰래 (국무회의) 처리했다는 면에서 절차에서조차 국민을 무시했다는 비판을 했다는 지적도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침략의 근성을 지금까지도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늘 경계해야 할 대상인 일본과 우리 정부가 군사적으로 손을 잡으려했다는 것”이라며 “특히 수십년 간 짓밟히며 피의 상처를 안고 있는 민족의 아픔을 대변하지 못할 망정 밀실에서 이런 일을 처리한 것이야말로 몰역사적이고 친일반민족적인 정권”이라고 성토했다.

정 처장은 “방송사들은 국민들이 필요성 여부에 대해 이해못할 때 방송은 역사의 연원을 일깨워주면서 그 의미와 문제가 뭔지, 바람직한 방향이 뭔지 짚어줘도 시원찮을 판에 ‘군사교류는 당연하다’, ‘장단점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거나 찬반주장을 나열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식이 결여됐다고 밖에 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