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가?”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선장님.”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을 찾아 헤맨다. 지난 번 항해에서 자신의 다리를 집어 삼킨 것에 대한 복수기도 하지만 흰 고래 모비 딕은 고래잡이의 가장 큰 도전이다. 포경선 피쿼드호의 대장 에이해브는 선원들을 닦달한다.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서 피쿼드호는 모비 딕을 추적한다. 누구나 무모하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나 반기를 들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고래는 리바이어던이었고 고래를 쫓는 사람 또한 바다의 절대군주로 불렸기 때문이다.

에이해브의 고집에 반기를 드는 건 항해사 정도다.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고개를 푹 떨구며 조언한다. “노인이여, 당신은 절대로, 절대로 그놈을 잡지 못할 겁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이 일을 그만둡시다. 이건 악마의 광기보다 더 나쁩니다.” 에이해브가 중세의 봉건적 장인이라면 스타벅은 그보다 백배는 합리적인 근대의 사람이다. 그는 한 마리 모비 딕을 쫓기보다 열 마리 고래를 찾길 원한다.

그렇다면 배의 다수인 선원들은? 이들은 고용된 노동자이긴 하지만 굳이 힘든 일을 택한 ‘사내녀석’이기도 하다. 돈 안 되는 일을 강요하는 에이해브 선장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환호’다. 선장이 포상으로 금화를 내건 점도 고려해야겠지만 이들이 선장의 무모한 도전에 기꺼이 동참하는 이유는 ‘자본주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합리보다는 중세적 권위에 익숙하다.

이 가운데 선장을 견제하며 포경선에 돈을 투자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사람은 항해사 스타벅뿐이다. 스타벅은 이른바 자본주의의 원리에 충실하며 피쿼드호에서 가장 합리적인 사람이다. 술에 취한 노동자와 자신을 구별하는 그는 자본주의적 인간을 대표한다. 스타벅스 커피가 밝힌 자신의 유래기도 하다.

“스타벅은 일부러 위험을 찾아다니는 십자군 전사는 아니었다. 그에게 용기는 감정이 아니라 다만 자기한테 유용한 것이었고, 실제로 꼭 필요한 경우에 늘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허먼 멜빌 <모비 딕>은 미국 낸터컷에서 출항한 포경선 피쿼드호에 대한 이야기다. 고래잡이가 주된 내용이지만 멜빌은 자본주의와 노예제도의 모순을 드러낸다. 현재 미국의 동북부에 살던 원주민 피쿼드족은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에 의해 전멸한다. 멜빌은 전멸한 원주민을 대변하고자 했고, 상대할 수 없는 백인의 힘을 모비 딕으로 표현한듯하다. 역사를 그대로 따라 소설은 비극으로 끝난다. 피쿼드호의 선원들은 고래의 움직임을 이길 수 없었다.

소설에서 비극만을 읽어내는 건 어리석다. 멜빌이 말하고자 하는 건 패배했다는 결과가 아니다. 소설의 배경은 대항해시대의 그늘이 남아있던 19세기 중엽이다. 퇴역 선원과 마을 주민 그리고 지역의 부호들은 돈을 모아 포경선을 꾸린다. 그들은 선장과 선원을 고용하고 몇 년 동안 필요한 물자를 실어준다. 선원들은 고래를 잡아 기름과 뼈를 실어 돌아온다. ‘하이델베르크의 술통’으로 불리는 고래 머리에는 값비싼 경뇌유가 차 있다. 그리고 이빨도 꽤 값이 나간다. 돈을 투자했던 사람들은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판 돈을 투자금에 비례해 나눠 갖는다. ‘배당’의 형태다. 자본주의의 원리는 고래잡이에도 그대로 이식됐다. 포경선은 하나의 법인, ‘주식회사’가 됐다.

주식회사 피쿼드호를 천천히 들여다보면 초기 자본주의의 원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주주를 비롯해 선장과 항해사는 백인이 차지하고, 나머지 일은 이주노동자가 담당한다. 선원들에게 임금은 없다. 이들에게도 배당의 원리가 적용된다. 고래기름을 저장고에 한 가득 채우고 살아 돌아온다면 이들은 수익의 500분의 1이나 700분의 1을 받는다. 이 소설에서 이른바 ‘북쪽의 자본과 남쪽의 노동’이라는 자본주의의 모습, 우리사주제도와 성과급제를 활용하는 자본의 노동규율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멜빌은 자본주의적 원리가 보편화되면서 노동 또한 자연스레 자본에 의해 포섭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700쪽에 가까운 <모비 딕>에서 그가 제시한 핵심은 ‘잡힌/놓친 고래’ 원칙이다. 스페인에서 네덜란드로 자본주의의 헤게모니가 넘어가던 17세기, 네덜란드가 공포한 포경법에서 유래한 이 원칙은 잡힌 고래는 잡은 자의 것, 놓친 고래는 먼저 잡는 자가 임자라는 단순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고자 만든 자본주의의 일반적 원리이기도 하다.

멜빌은 이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본래 원주민의 땅 텍사스를 백인이 침략해 빼앗은 사례를 들며 “소유가 법의 전부라면, 러시아 농노나 공화국 노예의 근육과 영혼은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가엾은 파산자에게 뜯어내는 턱없이 비싼 선불 이자는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했다. 그에게 세상의 대부분은 ‘잡힌 고래’다.

반대로 놓친 고래도 많다. 멜빌의 생각에 독립한 미국과 인도의 해방은 영국에게 놓친 고래다. 이어 멕시코는 미국에게 놓친 고래다.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놓친 고래는 자본과 권력이 시도했지만 실패했거나 눈독을 들이고 있는 모든 것이 된다. 요즘으로 치자면 KTX와 상하수도, 표현의 자유, 민주노조가 아닐까. 어쩌면 멜빌이 지적했듯 우리 모두일 수도 있다.

청와대 민간인 사찰의 진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요즘, 영화 <모비 딕>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권력과 언론이 시민을 잡힌 고래 취급하는 현실을 빗댄 영화다. 그에 반해 소설은 더 격렬한 말투로 현실을 꼬집는다. 영화와 소설이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커다란 지구 자체는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독자들이여, 그대도 역시 ‘놓친 고래’이자 ‘잡힌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모비 딕/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작가정신 펴냄/2011년 5월
원제: Moby Dick (1851년)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