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이토록 지극히 단순하고 아름다운 삶을 누가 바라마지 않으랴? 그러나 그 바램은 얼마나 이루기 힘겹고, 아득한가? 그래서 이 바램은 1975년 남진이 부른 가요 ‘임과 함께’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래, 지난해 TV 예능 서바이벌 프로그램 중 최고의 히트 상품이었던 <나는 가수다>가 재발견한 가수 김범수가 ‘님과 함께’로 제 2의 전성기를 자축하기까지 대중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며 불려왔다.

김범수씨가 남진의 흥겨운 곡을 박명수의 유치찬란한 ‘쪼~쪼~’ 추임새까지 곁들이며 돈 스파이크의 세련된 편곡에 실어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은 신명나게 후련하다. 나름 한가락 한다는 가수들조차 피가 바짝바짝 마르게 만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더 이상 등수에 연연하지 않아도 좋다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여유는 외모지상주의 연예계에서 한동안 얼굴 없는 가수로 살아야했던 김범수에게 ‘님’이 곧 대중의 사랑이요, 그 대중의 사랑이 행복이기 때문이었다. 그 행복을 이룬 자가 자신의 님인 대중과 공감하는 노래로 선택한 곡이 바로 ‘님과 함께’라는 것은 ‘통속성’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통속성’이란 일반에게 널리 통하는 대중성과 보편성이다. 자칫 먹물깨나 먹은 이들에게 저속하다고 무시당하기도 하고, 나름 예술입네 각잡는 이들에게 수준 낮다고 외면당하기도 하지만 통속성을 아우르는 정서는 삶에 맞닿아있는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어루만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중가요를 좋아한다.

벗들끼리, 가족들끼리 함께 하는 자리에서 젓가락이든, 기타든, 노래방 반주든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서로 노래를 나누는 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누리는 대중적 문화다.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당신만이>(극단 오늘, 위성신 연출)는 바로 이 통속성을 바탕으로 하는 뮤직드라마다.

불이 켜지면 네 명의 평범한 배우가 일상적인 차림새로 등장해 노래하며 춤춘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유행 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면, 님과 살 수만 있다면~ 쪼~쪼~’ 이렇게 시작하는 <당신만이>는 ‘님과 함께’의 가사처럼 한 평생 님이 옆에 있다 하더라도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초원 위에 지어진 그림같은 집은 고사하고 가족이 오순도순 살기가 얼마나 힘겨운지, 결혼 5년차 부부가 서른일곱 해를 함께 겪는 곡절과 풍파를 대중가요에 실어 관객과 나눈다.

남들은 몰라도 너만은 대접받고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 하나만 믿고 결혼한 남자는 일 년에 두 번 뿐이라던 제사가 무려 여덟 번, 보증 떠맡기고 달아난 놈을 친구랍시고 감싸면서도 어마어마한 빚보증에 망연자실한 아내에게 자기 조상 기리는 제사상만큼은 반드시 차리라는 사내, 딸만 둘인 게 아쉬워 처가살이 하면서도 늦둥이 아들 타령하는 가부장, 실직당한 시름을 술로 풀더니 사기꾼인 것을 뻔히 아는 놈도 친구랍시라고 동업해서 재기해보이겠노라는 허세, 사랑한다는 말은 낯간지러워 못하면서도 아내 눈길이 다른 사내에게 미치는 꼴은 못 보는 집착.

이런 남편이랑 사느라 눈물 콧물 마를 날 없으면서도 맞받아치며 욕설 섞어 할 말 다하고, 풀 거 다 푸는 기 센 아내. 제사상에 올릴 술을 병째 나발 불고, 욱하면 남편 이름 석자를 날로 불러 제끼며 가뜩이나 바닥에 떨어진 자존심을 깔아뭉개면서, 사사건건 돈돈 돈타령인 뻔뻔한 아줌마. 서로 안 헤어지고 사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악다구니 치다가도 언제 그랬나싶게 오글오글 정분이 깊은 부부의 이야기를 <당신만이>는 징글징글하지만 알콩달콩하게 품어낸다. 그렇게 품어내는 둥지는 평생 살아봐야 쨍하고 해 뜰 날 없는 소시민에게는 그림의 떡같은 초원 위의 집이 아니라 대중가요다.

<당신만이>의 뼈대가 대중가요라면 그 뼈대에 제대로 살을 입히는 건 능청맞은 경상도 사투리다. 남편과 아내가 평소에 여보 당신하다가도 서로 수틀리면 “야, 이필례!” “너, 강봉식이!”하며 막 불러 제치고, 미안하다 사랑한다 말하는 대신 “아, 쫌~”하며 버럭거리는 게 마음 상하기보다 정을 다지도록 만드는 독특한 경상도 지방색이 싸우면서 정들고, 정들면서 희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가부장 문화를 미워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든다.

<당신만이>의 주인공들이 사는 모습은 새삼스러울 것, 남다를 것도 없이 지지고 볶는 평범한 부부 이야기다. 무대는 들여다봐야 특별히 볼 눈요깃거리 없는 집구석이 아니라 달랑 벤치 하나에 가로등 하나. 등장인물이래야 강봉식, 이필례 부부 말고는 딸 하나에 사윗자리부 터 길거리 장사치까지 이런저런 역할을 두루 꿰찬 멀티맨으로 끝.

이 단출한 구성으로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배꼽을 빼놓을 수 있는 건 <그대를 사랑합니다>, <늙은 부부 이야기>, <사랑에 관한 다섯 가지 소묘> 등 그동안 줄곧 ‘부부여 무엇으로 사는가?’를 물어온 연출가 위성신과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그리고 그 안에 담아내는 정서까지 능청맞도록 자연스레 연기하는 배우들 덕분이다.

<당신만이>는 가부장 문화에서 가족이 겪는 일상의 문제들을 첨예하게 묻지도, 그 문제에 대해 대안적인 해결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무대에 올려놓고 보면 그 통속성이라는 게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기에는 참 부당하고, 웃어넘기기에는 울컥 가슴 에이게 만든다. 그래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가 아니라 ‘저렇게 산 부모님을 이해해야지. 그래도 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게 만든다. 악에 받쳐서가 아니라 가슴 저려하면서.

<당신만이>의 공연이 끝나고 객석에 불이 켜지자 관객들이 여기저기서 ‘이 공연 누구누구랑 한 번 더 봐야지.’라고 수근거리도록 하는 통속성의 매력은 힘 빠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깨 다독이는 부모님의 손길처럼 편안하다. 사실 ‘님’에 점 하나만 더해도 ‘남’되는 세상에서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 평생 산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이루기 힘든 그림같은 일인가?

(공연 일시 : 2011/09/23 ~ 2012/02/26 장소 : 대학로 소극장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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