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투위의 동지들이 박정희 유신독재의 언론통제와 탄압에 맞서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한지가 금년으로 39주년이 되고, 고용된 깡패들에 의해 꼭두새벽에 130 여명이 동아일보사를 강제로 쫓겨나 마침내 동아투위를 결성한 지도 38주년을 맞게 된다. 당시는 나나 동지들이나 머리는 흑발에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홍안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
민주화라는 꽃을 피우리라고 기대했던 1980년 ‘서울의 봄’이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의 군홧발에 짓밟히자 나는 동아일보사에 복직하겠다는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걸핏하면 집으로 찾아오는 ‘기관원’의 얼굴 보기도 지겨웠고, 박정희 뺨치는 전두환 일파의 폭거는 ‘유신의 연장&rsq
이 글은 김세은 교수가 동아투위 위원들을 직접 면담하거나 전화 또는 이메일로 대화해서 들은 내용, 그리고 민사재판부에 제출한 개인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한 논문()에서 주요한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긴 논문을 알기 쉽게 줄여 기고해주신 김 교수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주
1979년 10월에 우리는 서울 거여동의 성동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여기서 ‘우리’라 함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안종필 위원장과 홍종민 총무, 정연주 위원, 그리고 나를 가리킨다. 우리는 ‘자유언론실천선언’ 발표 4주년 기념일인 1978년 10월 24일에 ‘민주·인권일지&rsq
1. 들어가는 말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인 나의 삶에 관한 이 글을 동아투위의 성립 이전과 이후로 나눠 기술하려 한다. 동아일보 해직 사태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투위원 모두의 삶에 지울 수 없는 고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에 이르는 연배의 투위원들이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던 시기에 부닥쳐야 했던 사회로부터의 배
동아 광고탄압 시기에 겪은 감동적 경험 1974년 12월 하순 동아일보사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광고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자 국민들 이 자유언론실천운동을 격려하고 사원들을 돕기 위한 광고를 다투어 냈다. 1975년 초 어느 날, 현관 경비실에서 내게 전화가 왔다. 당시 나는 동아방송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분이 격려광고를 내려고 왔는데 나를 만나
내가 서울 생활에서 사회적 불의에 대해 적으나마 분노를 느끼며 마음과 행동의 방향을 어렴풋이 조정하기 시작한 것은 학생 주도의 4·19 민주혁명이 시작되던 1960년 3월 10일 경이었다. 1959년 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한국전쟁 때 1년 지체) 나는 등록금과 교복까지 무료로 제공해 주던 국립항공대학(철도청 산하)에 입학했다. 학교 강의는 용
종각번역실이 문을 연 것은 1975년 연말에서 이듬해 상반기의 어느 시점일 것이다. 나는 번역실의 창실 멤버는 아니었다. 당시 나는 주부생활사에 취직해서 라는 여성지 창간에 참여하고 있었다. 1975년 3월 12일 동아일보사 밖으로 내몰리고 난 후 약 4개월 동안은 매일 동아일보사 정문 앞에 도열해서 시위도 하고 만든 등사 팸플릿을
나에게는 아버지가 주신 소중한 애장품이 있다. 일본 가와데쇼보(河出書房)에서 1967년에 펴낸 두 권이다. 모두 24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1권 편과 9권 편을 아버지가 어린 나에게 사 주셨다. 당시 우리나라의 출판 환경으로는 발행이 어려웠던 고품질의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역사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틀린 경우가 많다. 1975년 발생했던 동아사태는 바로 이런 경우의 하나일 것이다. 탐욕덩어리인 언론자본과 단군 이래 최대의 폭군격인 박정희의 칼이 야합하니 민중의 사랑을 받던 한 언론사가 힘없이 쓰러졌다. 동아일보 사주 김상만은 한때 박정희 군사독재 권력과 싸우는 척했다. 독자
4월 혁명 겪으며 ‘독재자의 동조자 되지 않겠다’고 다짐 나는 1943년, 경북 경산에서 농사꾼의 3남으로 태어났다. 8남매(4남 4녀)를 먹여 살리랴, 학교 보내랴, 허리가 휘신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평소에 “판·검사가 되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평범하던 청소년이었다. 그러던 고등학교 2~3학년 때
홈그라운드를 빼앗긴 자의 슬픔 나는 1970년 가을에 25살의 나이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1년 동안 수습기자 생활을 마치고 방송뉴스부로 배치돼 경찰서만 5년 가까이 출입한 사건기자로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활동했다. 동아일보사 기자로 활동했던 이 시기를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간직하고 있다. 중고등학생 시절 모교에 있던 광주학생독립
나는 평생 사건 현장을 찾아 생생한 순간을 영상으로 취재한 사진기자였다. 내가 카메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뒷동산에 텐트가 몇 개 쳐져 있고 총을 멘 외국 군인들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그 무렵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리던 미군들이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나는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미군들을 찾아가 그들과 놀았다
나는 1968년 10월 동아일보사에 제11기 수습기자로 입사했다. 처음에는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기뻤으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수습이라고는 하지만 우선 월급이 쥐꼬리여서 생활에 찌들려야 했고 막상 신문사 안에 들어와서 보니 밖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기도 했다. 그리고 무언가 모르게 신문사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뛰어난 이
부끄러웠던 기자생활과 저항의 몸부림 1971년 유신헌법의 발효로 독제체제의 폭압통치가 강화되면서 언론의 상황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마치 동아일보 사원이기나 한 것처럼 아침마다 버젓이 편집국에 출근하여 오늘은 무슨 기사를 쓰는지 점검·감시하는 가운데 중요기사가 누락되거나 왜곡·축소되는 사례가 날마다 이어지고 있었
내가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것은 1967년 11월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동아일보사에 들어간 걸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이 서른에 남편을 여의고 어렵게 홀로 키운 아들이 학교도 다 마치기 전에 그 어렵다는 신문사 시험에 합격한 것만도 대견스러운 일인데, 그 회사가 대한민국 최고의 신문사로 알려진 동아일보사라니! 어머니는 처녀시절부터 동아일보 애독자이
추석 성묘 전 벌초를 다녀와서 사랑하는 홍종민 씨! 당신이 가신 후 24년이란 세월이 나에겐 너무나 긴데 사람들은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느냐고 말합니다. 흐르는 시간은 말이 없지만 뜻하지 않게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진 부부 간에 천 길 낭떠러지보다 더 깊은 아쉬움을 남기나 봅니다. 때로는 당신이 옆에 계신다고 착각할 정도로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지만 한 번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는 1936년 초 중국국민당 장개석의 공격을 피해 1만2500km에 달하는 고난의 대장정을 하면서 권토중래를 도모하고 있던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찾아 모택동을 만났다. 그 때 모택동은 “소년시절 나의 인생목표는 학교선생님이었다. 내가 지금처럼 핵심 공산당윈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인간의 의지는 주변 환경 앞에 꺾일
유년(幼年)에 만난 동아일보 내가 동아일보를 처음 만난 것은 국민학교(요즘의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면 단위의 한벽한 농촌이어서 신문 보는 집이 몇 안 되었는데 아버지는 고집스레 동아일보를 구독하고 계셨다. 도회지보다 하루쯤은 더디게 세상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동아일보를 받아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나름대로 가늠하셨던 것 같다. 뭐가 되겠다
1975년 3월 17일 미명, 유언론 사수를 외치며 닷새 동안 농성을 벌이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과 함께 나는 폭도들에게 떠밀려 동아일보사 문을 나섰다. 그리고 등 뒤로 ‘꽝’ 하고 정문 빗장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철제 셔터가 내려졌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사랑했고 열정을 바쳐 일해 온 동아방송과 나의 영원한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