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私)라는 한 글자는 나라를 망치는 근본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점차 이런 풍조가 횡행하여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공정하지 못한 일을 있기 때문에 길거리나 마을마다 이를 비판하는 이야기가 자자합니다. 그런데도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상감께서 어떻게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1662년(현종 3) 6월10일자 대사성 서필원의 상소 중 일부분이다. 조선왕조 중반에 해당하는 인조~현종 연간의 17세기는 공론(公論) 중심의 사림정치가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그 중심 기관은 삼사였다. 특히 홍문관은 옥당...
지난 1월 설 연휴를 앞두고 경기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 구제역이 발생했지만, 민·관의 노력으로 전국적인 확산을 막아냈다. 이제 구제역은 우리 국민 모두 재난으로 인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구제역과 비슷한 기록이 제법 있다. 당시에는 소의 전염병을 ‘우역(牛疫)’이라고 했다. 우역이 처음 실록에 등장한 것은 중종 36년(1541)이다.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소들 대부분이 우역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이후 선조 때까지는 우역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적다. 그렇다고 해서 우역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유는, 백성들이...
사신은 말한다. “허적(許積)은 평생 시세에 영합하고 임금의 뜻을 교묘히 맞추었으며, 겉으로는 화평한 듯이 보이지만 속으로는 은밀하고 사사로웠다.…(중략)…심지어 당시의 공론(남인 정권의 공론)에서 용납되지 못할 인사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공정한 듯 보이려고 이조판서에 추천했다가, 대간의 탄핵이 나오면 이를 따라 그들을 갈리게 했다. (허적의) 마음먹은 것을 교묘히 하고 수단을 번복함이 아! 심하도다! (원문 초략 번역, 숙종실록, 숙종 1년 2월 29일) 영의정 허적에 대한 사관의 인물평이다. 허적이 이조판서로 잇달아 추천한...
사신은 말한다. “이날 경연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礩)과 영의정 윤자운(尹子雲)이 영사(領事: 경연관의 우두머리)로서 빈청에 있었다. 둘은 예전에 사신으로 가서 즐거웠던 일, 평양(平壤)과 황주(黃州) 기생의 미모에 대한 평가, 그녀들을 희롱한 일 등을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때가 국상기간인데다 가뭄까지 더해 백성이 굶주리는 실정인데도 김질 등은 재난 해결과 백성을 구제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서로 음란한 말만 하였으니 장차 저 대신들을 어찌 쓸 것인가?” 성종 1년(1470년) 5월19일자 사신의 논평이다. 왕이...
사신은 말한다. “여원부원군(礪原府院君) 송일(宋軼)에게는 딸이 셋 있었는데, 모두 아비의 세력을 믿고서 남편을 노비 보듯 했다. … 딸 한명은 덕산현감(德山縣監) 이형간(李亨幹)에게 출가했는데, 이형간이 명을 받고 출입할 때 날씨가 아주 추운데도 부인이 문을 닫고 집에 들이지 않아 결국은 병에 걸렸다. 어느 날도 집에 못 들어가 바깥채에 누워 있었는데, 몸을 움직일 기력도 없었다. 결국 그가 지쳐서 죽은 것을 아침에야 알았다.(원문 초략 번역)” 『중종실록』 중종 12년(1517) 6월 3일의 기록이다. 이 사건을 두고 사간...
사신은 말한다. “이귀(李貴)는 지조가 단정하지 못하고 말에 법도가 없어서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임금을 친애하고 국사를 걱정했기 때문에 뭇사람의 비방을 피하지 않아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었다. 이 때문에 충성심만은 그에게 견줄 자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귀를 잡군자(雜君子)라고 하였다. 고관들에게 거리낌 없이 욕설을 해도 사람들이 성내지 않았고, 상소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임금은 그의 말을 써 주지 않았다. 국사의 어려움을 해결고자 온갖 정성을 다하였지만 한낱 고될 뿐 도움된 것이 없었다.(원문 ...
사신은 말한다. “이계(李烓)는 간사하고 교활했다. … 기회를 엿보아 원한을 가진 자들을 보복하고 선비들을 모함했다. 소인(小人)이 감정을 품어 보복하고 독기를 부려 국가를 해침이 매우 심하다.” 1638년(인조 16) 8월 8일자 인조실록에 기록된 사관의 논평이다. 이계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사관의 혹평을 받았을까. 서인이 주도한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새 왕 인조가 즉위했다. 서인들은 반정 뒤 광해군 시기 집권 세력인 북인도 일정 부분 조정에 참여시켰는데, 여기에서 공서(功西)로 불리는 공신들이 주축이 된 ‘현실론계 서인...
언론에서는 언제부턴가 당적을 바꾸는 인사를 철새로 비유했다. 의원직 유지를 위해 당을 옮기는 처사는 그리 떳떳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이념과 정체성이 아닐까. 이념이 바뀌고 정체성을 바로잡는다고 말한다면 그리 비난 할 수가 없다. 생각이 바뀐 것이니까. 요즘엔 당적을 옮긴 사실 보다 오히려 ‘막말’이라고 하는 튀는 언사로 이목을 끌고 있다. 언론으로서는 조회수가 중요하고 정치인으로서는 인지도가 중요하니까. 조선시대에도 정체성을 바꾼 사람들이 있다. 사신은 말한다. “조광조가 귀양 간 지 한 달 남짓 되어도 임...
조선시대까지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을 ‘환과고독’이라고 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의지할 곳이 없는 취약계층이라는 사실이다. 홀아비나 과부는 육아로 인해 생업을 가지기 힘들고, 고아와 독거노인은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 모두 스스로 자력으로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이다. 때문에 인정(仁政)을 이상 시 하는 조선왕조에서는 흉년이나 재난이 들면 의지할 곳 없는 환과고독을 가장 먼저 구제하려고 했다.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 환과고독을 보살펴 주는 것이 왕도정치에서 가장 먼저 할일이라고 하면서 이들에 대한 구휼과 부역(賦役)...
“옛날에 선왕(先王)들은 매일 새벽녘에 조당(朝堂)에 앉아서 정사를 듣다가 물러나서 소침(小寢)으로 가서 일에 종사했기 때문에 궁중 깊숙이 거처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밖에서 자리를 바로잡아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리가 바로 잡히면 뜻이 정해지고, 뜻이 정해지면 마음이 조용해지며, 마음이 조용해지면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치를 탐구하고, 여기에서 선한 본성을 기르면 어디로 가든지 통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며, 여기에서 정사를 생각하고 여기에서 사람을 만나면 어디에 거처하든지 마땅하지 않을 ...
“용관(冗官: 쓸데없는 관리)을 줄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관원이 번잡하게 많으면 정사만 방대해집니다. 지금 관아를 보면, 전혀 맡은 직무가 없는 곳이 있습니다. 이런 곳은 전부 없애야 합니다. 똑같은 직무를 나누어 맡은 곳이 있습니다. 이런 곳은 합쳐야 합니다. 인원은 많고 일은 없는 곳이 있는데, 이런 곳은 줄여야 합니다.” 이 말은 균역법(均役法)을 완성해 가던 호조판서 박문수(朴文秀)가 1750년(영조 26년) 7월3일에 임금에게 아뢴 내용 중 일부이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는 즉위 후 곧장 노론에게 정권을...
“중으로 출가하는 법이 자세하지만 관리들이 그 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役)을 피하는 자가 모두 중이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의논하여 아뢰라.” 이 말은 세조가 1464년(세조 10) 5월 6일 승정원의 승지들에게 직접 써서 보여준 글인데, 이에 대한 사신의 논평이 볼만하다. “도첩(度牒)이란 중이 출가했다는 신표(信標)이다. 근래 국가에 공역(工役)이 있으면 관(官)에서 공명도첩(空名度牒: 이름을 비워놓은 도첩) 수천 수백 통을 주어서 그 비용을 충당하는데, 일을 맡은 자가 이것을 얻으면 재물로 생각했다. ...
“국가의 성쇠와 인재의 득실은 오직 과거(科擧)의 공정함에 달려 있습니다. 기사년(숙종15 1689년)이래 사적 인연으로 등용되는 길이 크게 열려서 권세가의 친척과 부귀한 집안의 글자도 잘 모르는 어리석은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했으므로, 미리 출제(出題)를 알려 차술(借述)하게 했다는 비판이 자자합니다. 갑술년의 경화(更化: 갑술환국) 때에도 옛 습속을 그대로 답습하여 갈수록 더욱 오염되었기 때문에, 수년 사이에 대과나 소과의 과거시험장이 이 짐승들의 족적이 낭자한 진창과 같았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이번 초시(初試)에서는 극도에...
‘임금을 세우는 것은 백성을 기르기 위함이고, 백성을 기르는 방법은 그들의 힘을 아껴 주는 데 있을 뿐이다. 근래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나고 가문과 기근이 이어져 위에서 누차 걱정하고 있지만, 늙은이와 장년의 시체가 골짜기를 메우고 처자(妻子)가 서로 이별하며, 호구(戶口)가 줄어듦에 군액(軍額)이 줄어들어 나라의 근본이 약해져 국세(國勢)가 위태로워지게 되었으니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보고 어찌 크게 탄식만 할 뿐이겠는가. 눈물 흘리며 통곡해 마지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했다는 말을 듣...
‘오늘날 한반도의 시대적 소명은 두말 할 것 없이 평화입니다. 한반도 평화 정착을 통한 분단 극복이야말로 광복을 진정으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난 2017년 제72주년 광복절 기념식의 대통령 경축사의 일부분이다. 경축사 전문에서 모두 15번이나 우리나라를 가리켜 한반도라고 했고, 대한민국이라고 한 것은 19번이다. ‘한반도기를 들며 입장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올 초 평창동계올림 당시 남북한 선수들이 입장할 때 소식을 전하는 모든 언론 매체에서 등장한 기사이다. 경축사와 선수단 공동 입장 소식을 전하는 문장에서 특...
‘구수영(具壽永)은 영응대군(永應大君: 세종대왕 8남)의 사위이다. 폐주(廢主: 연산군) 때에 스스로 자기 여종을 골라서 궁중에 바치고 임금에게 아첨하면서 못된 짓을 자행하여 권세가 임금과 같아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였다. 반정 때에 그를 때려죽이려는 여러 장수들의 의논이 결정되었는데, 그때 마침 구수영의 집안사람이 그 사실을 구수영에게 누설했다. 그리하여 그가 먼저 장수들의 회의하는 곳을 찾아갔다. 이 때문에 과연 죽임을 당하지 않고 도리어 반정의 공훈을 받게 되니 당시 사람들이 분하게 여겼다.’ 중종 5년(1510년) 12월...
조선시대 붕당이라고 하면 흔히 동인과 서인, 남인과 북인, 노론과 소론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여기에 또 추가해야 할 세력들이 존재했다. 조선왕조 제17대 왕 효종의 등극을 앞두고 서인 내에서 새롭게 등장한 한당(漢黨)과 산당(山黨)이다. 한당이란, 글자에서도 보듯 한강 주변에 살던 인사들이고, 산당은 충청도의 회덕 등 산골 출신의 정치 세력을 말한다. 허나 이는 그들의 거주지를 따라 붙여진 이름일 뿐 그들의 출신지가 단순히 중앙이냐 지방이냐에 따라 정치 성향이 갈린 건 아니었다. 한당의 구성원은 실무관료진이자 정객으로 이름을...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즉위한 뒤부터 겉모습을 잘 꾸미고 말 잘하는 것을 잘난 것으로 여기는 무리들이 대부분 추천되어 등용되었다. 때문에 모두 겉모습을 가다듬고 잘난 척 뻐기면서 요행을 바라는 모습으로 조정의 풍습이 달라졌다. 이렇게 되자 임금도 그 폐단을 알고서 간혹 중후한 사람을 등용해 이런 폐단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둔하고 용렬한 무리들이 이런 구실로 조정에 많이 나오게 되었으니 인재 등용의 어려움을 여기서 알 수가 있다.” 1733년(영조 9년) 2월24일자 실록에 기록된 사신의 논평이다. 영조는 역대...
“내가 차례가 아닌데 외람되게 왕위를 이어받았고, 재주와 덕이 없는데도 옛 정치를 변개한 것이 매우 많았다. 군적(軍籍)의 정비, 호패법 실시, 사민(徙民) 정책, 경국대전 편찬 등의 일을 모두 한 때 거행하였고, 변방의 군사를 일으키는 일도 끊임이 없었다. 이 모두 백성들의 원망과 한탄이 되었다. 민심이 고요하지 않았는데 천심이 어찌 편안했으랴. 요즘 내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일은 진실로 불가한 것인 줄 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 병이 이미 5,6년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 내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남인(南人)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뉘어졌지만 서인(西人)을 공격하는 것에서는 두 편이 같은 소리로 합세하여 마치 벌떼가 모이듯 하였다.’, ‘선대 임금의 정치를 제멋대로 헐뜯고 당론(黨論)만 내세우니 공사(公事)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문서가 쌓여갔지만 결재하여 처리할 줄 모르고, 주야 할 것 없이 떼 지어 모여서 자기들끼리 몰래 말하는 모습이 마치 미친 사람들 같았다. 또 모두 이때를 이용해 탐욕을 부렸는데, 문을 열어놓고 뇌물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염치가 없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