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가 자신이 구속될 경우를 대비해 보험용으로 인터넷에 배포했던 미 국무부 외교전문 25만건이 들어있는 비밀파일이 지난 1일(현지시간) 풀리면서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편집되지 않은 외교전문이 그대로 노출될 경우 정보원들이 위험에 처하거나 미국 뿐 아니라 해당 국가들의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그동안 위키리크스와 손을 잡고 미 외교전문을 선별적으로 공개해 왔던 영국의 가디언, 미국의 뉴욕타임스, 독일의 슈피겔, 스페인의 엘 파이스, 프랑스의 르몽드 조차 이번 일에 대해 위키리크스와 어산지 쪽에 강한 유감을 표명할 정도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들 5개 매체는 이례적으로 낸 공동성명에서 "정보제공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며 위키리크스와 줄리안 어산지가 무책임한 결정을 내렸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우리는 철저한 편집 과정을 거친 문서만 공개한다는 분명한 원칙에 따라 위키리크스와 협력했다"며 "아카이브 전체를 공개한 것은 위키리크스의 설립자인 줄리안 어산지의 단독 결정"이라고 밝혔다. 가디언에 따르면 정보원의 신분이 노출된 외교전문만 1000여 건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위키리크스의 외교전문 공개는 미국 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에도 큰 파장을 불러올 전망이다.  특히,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미 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전문에 BBK 관련 내용도 들어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벌써부터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CNN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위키리크스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진 줄리안 어산지
 
경향신문 등에 따르면 대선을 앞둔 지난 2007년 10월25일 당시 한나라당 공동선대위원장이었던 유종하 전 외무장관이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BBK 주가조작 사건'으로 미국에 수감돼 있는 김경준 씨의 한국송환을 미뤄달라고 요청한 내용이 외교전문에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유 전 장관은 버시바우 당시 주한대사에게 '대선 전 김씨가 한국으로 돌아올 경우 정치적 충격이 폭발적일 것'이라면서 '조기 송환은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처럼 비춰질 수 있다'는 뜻을 전달했다. 

유 전 장관은 또 버시바우 대사에게 이명박 후보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으며, 집권하게 되면 한미동맹은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전했다. 대선 국면에서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었던 김씨의 귀국을 대선 이후로 막으려고 한 것으로 비춰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버시바우 대사는 1주일 뒤 유 전 장관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미 국무부는 이미 2005년 12월에 김씨의 송환을 결정했으며, 송환을 미룰 경우 오히려 미국이 한국 정치에 간섭한다는 오해를 받게 될 수 있다는 정반대의 이유로 유 전 장관의 요청을 거절했다.

실제로 김씨는 대선을 한달 남겨둔 2007년 11월 한국으로 송환됐으며 "BBK는 이명박 후보의 것"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후보에 대한 야당의 공세가 뜨거웠지만 검찰은 같은 해 12월 "BBK와 이 후보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 후보는 그 해 선거에서 이겼다.

BBK가 포함된 외교전문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 외에 더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재미블로거 안치용 씨는 자신의 블로그 '시크릿오브 코리아'에 올린 글에서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25만건의 외교전문 중 BBK 관련 전문은 모두 24건이라고 주장했다. 2007년 2월부터 2008년 1월까지의 문서에 BBK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안씨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 뒤인 1월18일 이 당선자 집권이후 전망을 언급한 전문에서도 BBK 관련문제가 언급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안씨는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안씨는 위키리크스가 미 외교전문 전체를 갑작스럽게 모두 공개한 이유에 대해 내부 갈등에서 요인을 찾았다. 운영진과 갈등 관계에 있던 위키리크스 관계자 누군가가 암호를 유출했으며, 이를 뒤늦게 알게 된 어산지가 현재까지 해온 선별적 공개의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전체 외교전문을 뒤늦게 위키리크스에 공개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한편, 어산지가 인터넷에 배포했던 비밀문서의 암호는 영어 알파벳과 아라비아숫자, 특수문자가 조합된 58개의 글자인 'ACollectionOfDiplomaticHistorySince_1966_ToThe_PresentDay#'로 알려졌다. 풀이하면 '1966년부터 현재까지의 외교역사모음'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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