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정치 블루칩’ 대접을 받을 때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을 느끼게 마련이다. 마음만 먹으면 정치권 새바람의 주인공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반기고 언론의 관심도 뜨겁다.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정치행보를 실행에 옮기면 당장 탄탄대로가 열릴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정치입문과 함께 혹독한 검증의 시기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좋은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진 보호막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고, ‘내공’의 깊이에 따라 정치행보의 미래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엄기영 전 MBC사장이 2일 한나라당 강원도당에서 입당식과 함께 출마기자회견을 하고 4.27 강원도지사 보권선거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엄기영 전 MBC 사장도 그런 전철을 밟고 있다. 준비 과정은 화려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는 유행어를 남겼던 ‘국민 앵커’ 엄기영. 그는 MBC 사장 시절에도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언론인이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MBC 사장 교체 논란이 벌어졌을 때 누리꾼들의 ‘엄기영 지킴이’ 움직임이 일기도 했다. 2010년 2월 우여곡절 끝에 MBC를 떠났을 때 그는 민주당 쪽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 언론장악 논란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대중적인 이미지도 나쁘지 않다는 점에서 ‘정치 블루칩’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지난해 강원도 7.28 재보선 과정에서 한나라당 쪽과 스킨십을 확대하면서 의문을 낳았고, 조용히 강원도 춘천으로 주소를 옮기면서 다시 입방아에 올랐다.

그러더니 ‘파란 점퍼’를 입고 강원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간접적으로 알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던 이들도 있었지만, 3월 2일 기자회견을 열고 한나라당 입당을 선언하면서, 그의 정치 노선과 색깔을 드러냈다.

아직도 ‘파란 점퍼 엄기영’의 모습을 어색하게 보는 이들도 있지만, 그는 한나라당 강원도지사 후보 경쟁에 공식적으로 뛰어들었다. 한나라당 후보로서, 한나라당 승리를 위해 힘을 쏟을 수밖에 없다.

그의 삶이 언론인으로서는 화려했을지 모르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이제 검증 무대에 서 있을 뿐이다. 문제는 도전의 대상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광역단체장(도지사 등)은 ‘정치력’이 검증된 이들이 도전하는 큰 무대이다.

엄기영 전 사장이 도전에 성공하려면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한나라당 후보군과의 경쟁에서 우선 승리해 공천을 얻어내야 하고 본선에서 야당 후보들과 경쟁해서 다시 승리해야 한다. 문제는 한나라당 승리방정식이 시작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엄기영 전 사장이 강원도지사라는 꿈을 이뤄내려면 한나라당 지지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야 희망이 있다. 그러나 보수 성향 유권자들에게 영향력이 큰 보수 신문들의 반응이 썰렁하다는 점이 걸리는 대목이다.

   
중앙일보 3월 4일자 33면.
 

중앙일보 박승희 국제부문 차장의 3월 4일자 <엄기영의 염치>라는 칼럼과 조선일보 주용중 정당부문 팀장의 3월 3일자 <대통령이 재보선까지 공천하나>라는 칼럼은 엄기영 전 사장의 가시밭길 정치 행보를 암시하는 예고편이다.

박승희 차장과 주용중 팀장 모두 청와대와 국회 등 정치 메커니즘을 잘 아는 정치 전문 기자들이다. 엄기영 전 사장 입장에서 그들의 얘기는 경청할 대목이 있다. 특히 쓴소리라면 더욱 그렇다.

박승희 차장은 이날 칼럼에서 엄기영 전 사장의 한나라당 입당 과정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엄기영 전 사장은 왜 한나라당을 선택했는지, 한나라당이 아니면 안 되는지에 대한 뚜렷한 소신보다는 “강원도에는 한나라당이 절대 필요하다”는 말로 대신했다.

박승희 차장은 “비겁하다. 그는 '내가 출마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강원도민 핑계를 댔다. '원래 내가 있을 곳은 한나라당'이라고 하느니만 못했다”고 비판했다.

앞서 조선일보 주용중 팀장은 “대통령이 언제까지나 당을 원격조종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청와대의 재보선 공천 개입에 대해 우려했다. 대통령 뜻대로 공천이 됐다고 해서 대통령 희망대로 재보선에 이길 수 있느냐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만의 까칠한 시선일까. 동아일보는 이보다 앞서 ‘엄기영 공천 불가’를 밝혔다. 동아일보는 3월 2일자 사설에서 “한나라당으로선 강원도지사 자리를 되찾아 오는 것이 급하겠지만 엄 전 사장을 공천함으로써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일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가 차례로 사설과 칼럼으로 한나라당의 엄기영 전 사장 영입에 대해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강원도는 예전의 강원도가 아니다.

보수언론과 보수진영이 든든하게 지원을 해줘도 여당의 강원도지사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데 본격적인 선거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보수언론이 힘을 빼고 있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엄기영 전 사장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다. 본선 경쟁력을 평가 받던 한승수 전 국무총리와 이계진 전 한나라당 의원은 모두 불출마로 정리됐다.

한나라당은 엄기영 전 사장으로 승부를 걸거나 인지도는 좀 떨어지지만 지역 기반이 있는 후보로 선수를 바꾸는 방법 밖에 없다. 강원도에서 절대강자로 인식되던 한나라당 처지가 참 딱하게 됐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이광재 바람’ 때문에 불의의 일격을 당했던 한나라당은 강원도지사를 다시 내준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장면이다.

그러나 승리방정식을 기대하며 뽑아든 ‘엄기영 카드’가 시작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보수언론이 ‘참 염치없는 엄기영’이라고 지적하다 어느 순간 ‘참 훌륭한 엄기영’으로 급선회하기도 어렵다는 점도 고민의 지점이다. 중앙일보는 칼럼을 통해 엄기영 전 MBC 사장의 한나라당 강원도지사 후보 도전을 이렇게 평가했다.

“정치에 감동이 없고 염치가 없으면 추한 협잡과 술수만 남는다. 주연배우 엄기영이 등장한 한국정치의 단만극은 앵커 시절 그의 멘트처럼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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