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가 지난 8일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에 대해 "본인이 분명하다"고 밝힌 가운데, 강효백 경희대 국제법무대학원 교수가 "사진 속 인물은 윤 의사가 아니다"라고 재반박하고 나섰다.

강 교수는 지난 1999년 '윤 의사 연행 사진'이 조작됐을 가능성을 처음 제기한 사람으로, 윤 의사가 거사 3일 전 한인애국단 선서식 때 찍은 사진과 거사 이틀 후 일본 아사히신문에 게재된 사진의 얼굴이 다르다는 점을 들어 일본이 의도적으로 ‘연행 사진’을 조작했다고 주장해왔다.

강 교수는 10일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가짜 사진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사히신문이라는 2차, 3차 자료에 의존하는 반면 나는 1차 사료인 당시 신문기사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다시 한번 1932년 5월1일자 1면 아사히 사진 속 인물은 윤 의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 1932년 5월1일 아사히 1면  
 

“의거 직후 회색양복에 피투성이”

   
  ▲ 의거 3일 전 한인애국단 선서식  
 

강 교수는 ‘연행 사진’에 의문을 품었던 지난 1999년 상하이도서관에서 등 영자지 5개와 신보, 중앙일보, 신문보 등 중문지 3개에 실린 윤 의사 의거 기사를 살펴봤다고 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윤 의사는 현장에 있던 일본군인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피투성이 상태로 끌려갔고, 입고 있던 ‘회색 양복’ 역시 찢긴 상태였다. 강 교수는 1932년 4월30일자 <상하이타임즈> 보도를 한 사례로 지목했다.

… There, somewhere in the vortex of the swirling mob, was the Korean named In Feng Su. He was the beaten down. Fists, boots and sticks smashed him down again. If ever a man faced death it was the Korean. He had worn a grey suit- a foreigner's clothes. Soon that grey suit lay in pieces upon the earth. Shortly afterwards the Korean, too, lay on the ground, very still. His body lay strangely shapeless. A cordon of soldiers with bayonets fixed, kept the crowed at bay. An inner cordon of police and military officers stood over the body.Soon a car appeared. The Korean was picked up by the head and the legs and flung bodily into the back of the sedan. He was still breathing. …

… 군중들 사이를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곳에 한국사람이 윤봉길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당하여 때려 눕혀졌다. 주먹질,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뚱어리 위로 쏟아졌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한국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 볼 수 없도록 이상한 모습으로 놓여있었다. 총검을 가진 군인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하였다. 군경들이 비상경계선 안에서 윤봉길의 몸뚱어리를 감시하였다. 곧 차 한대가 나타났다. 그 한국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집어 들려 짐짝처럼 통채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

강 교수는 “하지만 아사히 사진 속 인물은 바바리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손에 쥐었고, 얼굴도 폭행의 흔적 없이 깨끗하다”고 강조했다.

“당시 체포자만 7~40명”

강 교수는 또 당시 신문기사를 종합해볼 때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만 7~40명 선이었다는 점을 ‘조작된 사진’의 근거로 들었다. 폭탄이 터진 단상 앞쪽엔 파편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병원으로 후송했다는 식의 표현이 기사에 있고, 무엇보다 일본으로선 주범이든 종범이든 일단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다 조사해봐야 했을 것이기 때문에 아사히에 실린 사진 속 인물도 이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 1932년 5월1일자 아사히 2면  
 

“1차 자료가 가장 중요”

   
  ▲ 1932년 5월1일자 아사히 2면 클로즈업 사진  
 
강 교수는 “무엇보다 사건 현장을 담은 당시 1차 자료의 신뢰성이 그 어떤 자료보다 중요하다”며 “그들이 내세우는 노스차이나데일리에 실린 사진(도왜실기가 다시 재수록) 등은 일본 통신사인 니혼덴포(NIHON DEMPO)에서 배급한 것들”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현지의 1차 자료가 분석의 ABC 아닌가? 1999년 상하이도서관에서 1932년 4월30일자 신문을 보며 열람기록부를 작성하는데 내 앞에 한국사람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일본, 중국, 하다못해 독일 사람도 당시 기사를 열람했는데 우리나라 학계와 언론계는 대체 뭐했나? 1차 자료도 살펴보지 않고 당시 적국이었던 일본 신문 내용만을 맹신했다는 얘기 아닌가?”

"한창 때라 기절했다가도 일어날 나이라니"

강 교수는 또 이번에 국가보훈처의 의뢰를 받아 사진을 분석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발표에 대해서도 “기존의 근거를 가지고 주장을 반복한 데다 그 근거도 참으로 황당하다”고 비판했다.

강 교수는 그 사례로 김용달 수석연구원이 지난 9일 헤럴드생생뉴스에서 ‘연행 사진’에 폭행 흔적이 없다는 기자의 지적에 대해 "의거 당시 윤의사가 25세이다. 한창 때라 기절했다가도 일어날 나이가 아니냐"고 말한 것을 사례로 들었다 (기사 제목 <"사진 속 인물 윤봉길 아니다" 강효백 교수 반론>).

아사히는 왜?

강 교수 말이 맞다면 당시 아사히는 왜 다른 인물을 지면에 실으면서 윤 의사 연행 장면이라고 했을까? 강 교수는 1932년 4월30일자 중문지 신보(申報) 1면에 실린 기사를 근거로 “일본이 은폐하고 싶은 게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사후, 일본신문기자들은 일본 영사관 및 일본군 헌병 사령부에 모여 취재를 진행, 관계자는 ‘현재 수사중’이라며 범인에 관한 일체 소식 및 심문상황을 절대 비밀에 붙였다. 수사종료 직전에는 결과 발표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사건당일인 29일 날 밤 일본총영사관의 한 영사는 일본 국내 각 신문사에 “사건 소식 발표에 신중을 기하라고” 통지하였다. …

그는 "4·19나 5·18 때 참상을 전하는 언론을 떠올리면 된다"면서 “24살 청년이 일본군인들에게 얻어터진 모습이 신문에 실리면 당시 조선사람들로서는 크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을 것 아닌가? 일본은 그래서 언론보도를 자제시켰다”고 추측했다.

실제 아사히에 실린 문제의 사진도 의거가 일어나고 난 이틀 뒤에 보도된 것이다. 물론 강 교수의 문제 제기에 대해 윤 의사 유족인 고 윤남의, 윤주 옹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고, 안타깝다”면서도 “다 그런 건 아니다. 양재동에 있는 윤 의사 동상에 대해 ‘생전에 한 번도 입지 않은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다’며 윤명의 옹 등 다른 유족들이 문제 제기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강 교수는 “학계와 언론에서 아사히 2면에 실린 사진은 잘 다루지 않는 것 같다”며 “얼굴 옆 모습만 나온 1면 사진에 비해 육안으로 얼굴을 구분해 보기 쉽다. 이 사진을 기사에 꼭 실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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