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적 은폐, 2차 가해, 가혹한 ‘피해자다움’ 요구, 피해를 ‘흥미’ 위주로 소비한 언론. 1년 전 생방송 뉴스에서 검찰 내 성폭력을 고발하며 ‘미투’ 운동을 견인한 서지현 검사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고통 받는 원인으로 이 네 가지를 지목했다.

서 검사는 29일 더불어민주당 여성폭력근절특별위원회가 미투 1년을 주제로 주최한 간담회에서 “이제까지 성범죄는 결코 개인 범죄가 아니라 집단 범죄, 약자인 여성을 상대로 한 일종의 ‘홀로코스트’였다”며 “공포와 수치로 피해자 입을 틀어막아 온 잔인한 공동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년 전 이날 서 검사의 고발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권력 최고위층에 있는 검사조차 성폭력 피해와 보복 인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 폭로됐다. 검찰 내부에서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 정황도 나타났다. 서 검사의 인간관계, 업무능력을 비롯한 ‘피해자의 행실’을 운운하거나 심지어 외모를 조롱하는 2차 가해가 횡행한 검찰 조직의 부조리가 드러났다.

▲ 1월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회의실에서 '서지현 검사 #미투 1년, 변화 그리고 나아갈 방향'을 주제로 좌담회가 열렸다. 사진=노지민 기자
▲ 1월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회의실에서 '서지현 검사 #미투 1년, 변화 그리고 나아갈 방향'을 주제로 좌담회가 열렸다. 사진=노지민 기자

그럼에도 서 검사로부터 용기를 얻은 피해자들의 말하기는 끊이지 않았다. 안태근 전 검사장은 지난 23일 서 검사에 대한 성추행과 인사불이익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서 검사는 “검찰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 가해자는 제대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 피해자는 보호 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피해자, 공익제보자로 살며 느낀 고통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였으며 실제로 많은 피해자들은 때로 생을 마감한다”고 말했다.

서 검사는 “많은 이들이 ‘검찰 내 성폭력 문제가 근절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앞으로는 서지현처럼 입을 열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며 2차 가해와 ‘피해자다움’ 강요를 일삼는 사회를 비판했다. 그는 “이 사회는 지나치게 가해자·범죄자에게 관대하다. 피해자에게는 괴롭고 우울하고 죽을 듯한 고통 속의 모습을 강요한다”며 “피해자야말로 누구보다 행복해져야 한다. 가해자·범죄자야말로 가해자다움, 범죄자다움을 장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부추긴 언론의 책임도 강조했다. 서 검사는 “언론에 부탁드린다. 언론은 피해자 고통에 대한 공감, 보호, 근본 원인을 발견하기 위한 해결책 연구에 별 관심 없이 피해자를 성적 흥미 대상으로 소비하고 사생활·인권침해에 오히려 앞장섰다. 2차가해와 피해자다움이라는 가혹한 요구가 이어진 데는 언론 책임도 크다”고 지적한 뒤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 처벌, 근본 원인 분석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촉구했다.

언론 보도가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은 이미 수차례 나왔다. 피해를 선정적·구체적으로 묘사하지 말라는 보도 윤리를 무시하고,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신상 털이’에 동참하는 등 관음적 행태를 보였다. 기계적 중립, 공정보도라는 명목으로 피해자에 대한 음해성 주장을 검증 없이 전했다. 이 같은 문제는 검찰, 문화·예술계, 학교, 체육계 등 새로운 분야의 성폭력 고발이 있을 때마다 놀라울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젊은빙상인연대 부회장인 권순천 코치는 “서지현 검사의 용기를 시작으로 지난 1년간 문화계에서 체육계까지 (미투가) 이어졌다. 체육계에서도 용기 낸 선수들이 여러 종목에서 나왔다”면서도 “(선수들은) 피해 사례가 언급될 때마다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더욱 주저하게 된다”고 밝혔다.

권 코치는 “피해자들과 접촉해 보면 피해자로서의 신분이 되는 것, 가해자의 보복을 두려워했다”며 “한 예로 피해자가 피해 사례를 얘기함과 동시에 운동을 그만두는 일이 있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분들이 있는 현장에서 피해자가 피해다니는 신세가 된 것이 대다수”라고 밝혔다. 권 코치는 피해자 상담·보호를 위한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 구성, 지도자·선수간 구시대적 위계질서와 폭력이 만연한 기존 ‘엘리트 체육 시스템’ 개선을 촉구했다.

서 검사는 “피해자들이 입을 열 수 없게 만든 것이 그들의 두려움과 나약함 때문일까, 피해사실을 들여다보기보다 그들을 ‘꽃뱀’ ‘창녀’로 부르며 손가락질한 공동체 때문일까”라고 물었다. 그는 “누군가 정의와 진실을 말하기 위해 모든 걸 불살라야 하는 비정상적인 시대는 끝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폐되기 쉬운 지역 성폭력, 학교 내 성폭력 근절하려면

이날 좌담회에선 지역의 문화·예술계, 학교 내 성폭력 등 특수성이 있는 공동체의 성폭력 근절 대책 마련도 촉구됐다. 연극배우 송원씨는 “지역 문화계는 또다른 특수성이 있다”며 “여기 계신 서지현 검사가 용기 있는 발언을 했고 각종 언론 보도와 SNS를 통해 봇물 터지듯 폭로가 이어졌지만,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 만큼 조용했다”고 입을 열었다.

송씨는 “‘한 다리 건너면 다 안다’는 말이 있다. 피해자에게 엄청난 압박”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역 예술계는 몇몇 인사들이 독점하고 있다. 공적 지원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예술인들은 시·도 사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진입장벽이 굉장히 높고 사업을 수행했던 단체만이 다시 사업을 수행한다”며 “더 심각한 건 이 문제에 대해 지역구 의원이나 당 차원에서 적극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례로 전주시에 직접 공적지원금을 받는 단체들이 문화체육관광부 표준계약서와 함께 성평등 서약서도 의무적으로 작성하도록 제안했으나, 몇몇 단체 반발로 중단됐다고 했다. 송씨는 “문체부 공고문엔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등 내용이 있지만 지역 행정기관이 의지를 갖지 않으면 실효성이 없다”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피해자들이 2차 가해에 심각하게 노출된 성폭력 사건들이 있다. 지역에서도 성폭력에 대항하는 다양한 조직이 생겨 담론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기획자 양지혜씨는 “2018년 10월 기준 총 65개 학교에서 스쿨미투가 있었고, 현재 총 80개 학교에 이른다. 단순히 한 사람의 교사에게 한 학생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재학생이 동시에 경험한 사건”이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스쿨미투를 알리고 집회를 계획하는 등 고발자들이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지만 이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정부 대책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씨는 “고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공론화한 뒤 허위제보로 치부돼 오히려 사과를 요구 받거나, 공론화 뒤에야 가해교사 중 일부가 사과를 하는 식으로 문제가 마무리됐다. 가해 사실은 교육청이나 경찰 수사로 적극 이관되지 않았다. 사과를 받아내는 과정에서 고발자들은 무기력을 느꼈고, 용기를 내 진행한 스쿨미투 고발이 지지받지 못해 유실되고 있다”고 전했다.

▲ 1월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회의실에서 '서지현 검사 #미투 1년, 변화 그리고 나아갈 방향'을 주제로 좌담회가 열렸다. 사진=노지민 기자
▲ 1월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회의실에서 '서지현 검사 #미투 1년, 변화 그리고 나아갈 방향'을 주제로 좌담회가 열렸다. 사진=노지민 기자

국회, 법안 발의 그치지 말고 실효성 있는 입법 나서야

현재까지 국회에 발의된 미투 관련 법안은 최소 145건, 이 가운데 본회의 통과 법안은 24.1%인 35건에 그쳤다. 용기 있는 고발이 언론 보도로 알려질 때마다 경쟁적으로 법안을 쏟아낸 의원들이 실제 입법 여부에는 뒷짐을 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호중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투 법안이 이렇게 많은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비슷한 내용이 대부분이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가십거리를 기사화하는 언론처럼 부작용이 클 수 있는 이상한 법안을 만들어놓은 경우도 있었다”며 “입법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발의만으로 그친 건 아닌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사회적으로 금지해야 하는 성폭력이란 피해자 동의 없이 이뤄지는 성적 행동들을 말한다. 이를 입법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은 국제사회에서 비동의간음죄 신설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며 “비동의간음죄 신설과 더불어 형법적 대응에 있어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폭력에 보다 근본적인 처벌을 강화하는 입법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한 의원이 비동의간음죄가 왜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느냐는 기자 질문에 ‘사회적 합의가 부족해서’라고 답을 했더라. 사회적 합의가 부족해서 못했던 걸 미투를 계기로 이제 해보자는 게 우리 요구사항 아닌가”라며 “힘에 버겁다고 얘기할 문제가 아니다. 합의 부족을 타파하고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해달라고 당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영순 미투 시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직장 내 또는 문화·예술·교육 등 분야별 특수성을 반영한 제도개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은 “소요 예산이 적고 저항이 적은 법안부터 처리되고 있다”며 “피해자 구제에 있어 짧은 소멸 시효, 징벌적 손해배상, 피해자 증언체계 강화 등은 훨씬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다른 이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폭로한 서지현 검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지난 1년 많은 변화가 있었다”며 “안태근 전 검사장 징역 2년, 이윤택 감독 징역 6년, 김생민·정봉주 업계 퇴출, 이재록 만민중앙교회 목사 징역 15년, ‘비공개 촬영회’ 모집책 최아무개씨 징역 2년6개월, 전남 CBS 성폭력 사건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 권고 사항 변화 등 전사회적 변화를 조금씩 만들어내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미투 운동은 우리 사회에 강간죄 의미를 새롭게 쓰고 있다. 그동안 정조에 관한 죄라는, 피해자가 말하지 못했던 범죄를 피해자 인권을 침해한 범죄로 볼 수 있게 만든 건 시민의 힘”이라며 “이것이 법체계에 반영돼 정의로운 판결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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