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언론과 방송이 달라지고 있다. 1당 독재 체제 기관지가 ‘자유 언론’으로 환골탈태하고 있단 건 아니다. 생생한 사건 소식을 빠른 시일 내 전달하며 조금이나마 신문(新聞)다워지고 있다. 주목할 만한 변화다.

북미 정상회담 당일인 지난 6월12일 오전, 북한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 지면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싱가포르 야경을 시찰했다는 보도가 실렸다. 김 위원장이 전날 오후 9시 숙소에서 나와 야경을 둘러본 뒤 다시 숙소로 돌아간 시각은 오후 11시22분. 평양 시간으로 12일 오전 12시22분이었다. 평소 같으면 마감했을 시간이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로동신문은 이 소식을 싱가포르 야경 사진 14장과 함께 전했다.

1998년 탈북한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관훈저널 9월호 기고글(‘로동신문 변화로 본 김정은시대 북한 언론’)에서 “로동신문이 판갈이 시간대 발생한 기사를 처리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이는 김정은시대 들어, 특히 올해 들어 달라진 북한 매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했다.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내외가 지난달 20일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내외가 지난달 20일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주 기자에 따르면 노동당 선전선동부 결재까지 받아야 하는 이 신문은 수많은 단계의 교열을 거친다. 오탈자 하나 나오지 않기로 유명하다. 정확성을 위해 신속성은 포기해 왔다. 그러나 북미 싱가포르 회담의 경우 단 몇 시간 만에 ‘본사정치보도반’이란 바이라인을 단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로동신문은 보통 여섯 개 면이 발행된다. 기자는 500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1년에 기사 한두 개만 쓰는 기자도 적지 않았다. ‘김정은 현지 시찰 보도’ 등 틀에 박힌 기사만 쓰던, ‘너무 편안했던’ 그들이 최근에는 신속·정확 보도에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

주 기자는 북한 기자들의 취재 태도도 달라졌다고 진단했다. 지난 4월 남북 정상의 판문점 회담에서 “팔에 빨간 완장을 찬 북한 기자들은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고 티격태격 남쪽 기자들과 신경전을 벌였고, 남녀 할 것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정적으로 취재했다”는 것이다. 북한 취재 방식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장면이라고 한다.

실제 판문점 도보다리 단독 회담 때 북한 취재진의 초 밀착 취재에 김 위원장이 물러나가라고 손짓하는 모습도 이목을 집중시켰다. 최근의 신속 보도는 북한을 대표하는 통신사와 방송사인 조선중앙통신과 조선중앙방송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주 기자는 이와 관련 북한에서 로동신문 인기와 신뢰도가 높아졌다고 전했다. ‘거짓선전이 가득한 어용 매체’에서 비로소 ‘신문다워졌다’는 것이다. 로동신문 인기가 높아지면서 신문을 스마트폰으로 구독하는 이들도 늘었다. 로동신문 발행부수는 30만여 부로 추정된다. 북한에 보급된 휴대전화가 450만대가량인 걸 고려하면 가능 독자 규모가 10배 이상 늘었다.

주 기자만 북한 매체 변화를 주목한 건 아니다. 지난 1일 KBS ‘뉴스9’도 북한 방송의 달라진 모습을 보도했다. 이를 보면 북한 방송 진행자 뒤 영상이 고화질로 송출되거나 부조정실의 PD 모습을 등장시켜 생방송 느낌을 살리는 등 과거 방송과 차이가 두드러졌다. 군중이 많이 모인 행사에 드론을 활용한 항공 촬영 기법이 도입된 것이나 교양 프로그램 제작에 가상현실(VR) 기술이 활용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 지난 1일 KBS ‘뉴스9’은 북한 방송의 달라진 모습을 보도했다. 사진=KBS 뉴스9
▲ 지난 1일 KBS ‘뉴스9’은 북한 방송의 달라진 모습을 보도했다. 사진=KBS 뉴스9
윤진 KBS 기자는 해당 보도에서 “남한 등 외부 프로그램을 접하면서 주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졌고, 선진화한 기술을 주민들이 누릴 수 있게 하겠다는 김정은식 통치 방식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한 뒤 “이 같은 파격 방송은 교시나 지침대로 움직이는 데 익숙했던 북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고 전했다.

주성하 기자는 관훈저널 기고글에서 “북한 언론이 변화한 것엔 김정은 의지가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지만 로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언론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진 김여정 역할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며 “김여정 등장 후 북한 언론 보도 스타일은 두드러지게 변했다. 특히 김정은 우상화나 체제 장점만 선전하던 북한 매체들이 내부 치부를 공개하며 김정은 지시를 잘 실행하지 않는 기관을 비판하는 일도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최근 3년 동안의 북한 매체들은 과거 30년간 이뤘던 변화 이상을 겪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며 “올해 김정은이 오랜 은둔을 깨고 외부로 나오면서 북한 매체들 변화가 특히 두드러졌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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