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정부 국가정보원의 공영방송 장악 정황을 확인할 수 있는 MBC 장악 문건(‘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방안’)을 이해하기 위해선 2010년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MB정부 청와대에도 보고된 이 문건은 ‘노영방송 잔재 청산’, ‘고강도 인적 쇄신’, ‘편파 프로 퇴출’에 초점을 맞춰서 MBC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MBC 파업 주도자에 대해 “적극적 사법 처리로 영구 퇴출 추진”이 필요하다거나 “노조 배후 인물 및 전임 사장 인맥을 일소”해야 한다는 식의 문건 내용, “척결”, “저질·편파방송”, “물갈이 추진” 등의 원색적인 표현에선 MBC에 대한 MB정부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국정원 개혁위원회에 따르면, 국정원 담당 부서는 2010년 2월16일 원세훈 국정원장의 ‘MBC 신임 사장 취임을 계기로 근본적인 체질 개선 추진’ 지시에 따라 해당 문건을 작성했고 3월2일 지휘부에 보고했다.

원세훈 원장 지시는 엄기영 MBC 사장(2008년 2월~2010년 2월) 자진 사퇴 후 일주일여 만에 이뤄진 것이다. 형식만 ‘자진 사퇴’였을 뿐이다. 

MB정부가 추천한 뉴라이트·친여 방송문화진흥회(MBC 대주주) 다수 이사들의 사장 퇴진 압박은 이사들이 선임됐던 2009년 8월부터 계속됐다. 뉴라이트 인사들의 방문진 입성에 대해 “엄기영 사장 교체 신호탄”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국정원 문건은 방문진이 그토록 엄 전 사장을 압박한 이유를 확인시켜준 단서다.

▲ 엄기영 전 MBC 사장이 지난 2010년 2월8일 서울 여의도 MBC 본사 마지막 퇴근길에서 노조 조합원들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MBC본부
▲ 엄기영 전 MBC 사장이 지난 2010년 2월8일 서울 여의도 MBC 본사 마지막 퇴근길에서 노조 조합원들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언론노조 MBC본부
엄 전 사장은 19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국정원까지 개입됐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만 “MB가 들어서고 MBC PD수첩 광우병 보도 때문에 정권이 비틀거리게 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당시 기자 출신 이동관이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는데 그가 ‘MBC는 그냥 놔두면 안 된다’고 격렬하게 반응했다는 이야기 등은 많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엄 전 사장은 “(MB 정부는) ‘좌파적 시각을 가진 언론인들을 척결,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며 “정권과 맞선다고 하는 게 많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MBC 파업에 대해선 “어려운 상황 속에서 후배들이 언론을 지키기 위해 힘든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평가한 뒤 “선배로서 그때 내가 매를 계속 맞았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했다.

엄 전 사장은 현 김장겸 MBC 사장 체제에 대해 “김재철 사장 때부터 MBC 구성원들을 대하는 방식은 완전 잘못됐다”며 “기자·PD 하겠다고 온 친구들을…. 그들을 설득해 함께 가야 했다. 내 뒤 후배 사장들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래는 엄 전 사장과의 일문일답.

- 국정원의 MBC 장악 문건이 공개됐다. 알고 있나.

“신문에 나온 거 봤다. 알고 있다.”

- 어떻게 받아들이나? 문건 작성 시점은 엄 사장 사퇴 직후다.

“글쎄…. 그때 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다. MB가 들어서고 ‘MBC PD수첩 광우병 편 때문에 정권이 비틀거리게 됐다’, ‘좌파적 시각을 가진 언론인들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MBC를)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런 방송인들을 척결·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MB정부가) 했던 게 아닐까 싶다.”

▲ MBC 엄기영 사장이 2010년 2월 서울 소공동 롯테호델에서 열린 방문진 이사회를 마친 뒤 나와 기자들에게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MBC 엄기영 사장이 2010년 2월 서울 소공동 롯테호델에서 열린 방문진 이사회를 마친 뒤 나와 기자들에게 사퇴 의사를 밝히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 국정원이 MBC 인사에 개입했다고 생각한 적 있나.

“그때는 그런 생각 못했다. 이동관이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다. 이동관 수석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데 그가 ‘MBC 저거는 가만 놔두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격렬하게 반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엔 국회에서 ‘MBC 사장 물러나라’는 결의를 하기도 했다.(편집자주 : 2009년 6월 한나라당 초선 의원 40명은 PD수첩 취재와 보도 과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이유로 엄 사장의 퇴진을 촉구했다.)”

- 2008년 8월 해임된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이듬해 엄 사장에게 “절대 스스로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편지를 쓰기도 했다. 당시 왜 더 버티지 않았나. 

“제도적 허점이 있지만 방문진 이사장에는 그래도 ‘인격자’들이 많이 왔다. 방송사 경영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하지 않았다. 언론 관련해서는 MBC 사장이 알아서 하겠지, 하는 관용의 정신이 있었다. 그 덕에 언론 자유를 지키려는 쪽으로 (MBC가) 운용됐다. MB 정부 들어서 방문진이 척결을 운운하는 등 스스로 정권 선봉대 역할을 했다. 내 입장에서는 손해를 보더라도 관용의 방식을 찾으려고 했다.”

- 너무 안일한 생각 아닌가. 

“정권과 맞선다고 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그때도 많이 힘들었다.”

- 후배들은 현재 파업 중이다. 어떻게 바라봤나. 

“후배들이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 또다시 언론을 지키기 위해 힘든 길을 선택했다. 선배로서 그때 내가 계속 매를 맞았어야 했는데, 그런 아쉬움이 있다.”

- 김장겸 MBC 사장과 후배 언론인들이 강대강으로 대치하고 있다. 어떻게 평가하나. 

“김재철 사장 때부터 구성원을 대하는 방식과 대처는 완전히 잘못됐다. 기자, PD 하겠다고 MBC에 온 친구들에게…. 어쨌든 그들을 설득해 함께 가야 했다. 내 뒤의 후배 사장들에 대해서는 코멘트하지 않겠다.”

▲ 엄기영 전 MBC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엄기영 전 MBC 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이후 정치권 행보에 대한 비판도 있다.(그는 2011년 4월27일 강원도지사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당시 상대 후보는 또 다른 MBC 사장 출신 최문순 현 강원도지사였다.)

“강원도에 가서 마지막으로 봉사하고 싶었다. 강원도민들 입장에서 판단한 선택이었다.”

- 그 당이야말로 MBC 사장 퇴진 운동에 안간힘을 썼던 정당인데. 

“나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다. MBC 출신 민주당 정치인들이 많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당을 선택하는 것이 후배들에게 더 큰 짐이 될 것 같았다. ‘MBC는 민주당 방송 아니냐’는 비판도 나올 수 있으니까. 지금도 강원도민들이 그런 선택(엄기영을 찍는 선택)을 했더라면 강원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순조로웠을 거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