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문 MBC 부사장에게 ‘MBC 녹취록’은 훈장이었다. 녹취록에서 그는 “증거 없이” 최승호 전 MBC PD와 박성제 전 기자를 해고했다고 스스로 밝혔는데도 지난달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MBC 녹취록은 공영방송 파괴자의 승전보였다. 그는 BBK 문제나 광우병을 다룬 프로그램을 “다 통제하고 있다”고 했고 ‘시사매거진 2580’이 쌍용차 문제를 다룬 것에 대해 “내가 있으면 안 뚫렸지”라고 호기를 부렸다. 프로그램을 틀어쥐고 제작과 편성에 개입했음을 자랑스럽게 떠든 것이다.

녹취록에는 2012년 170일 MBC 파업 이후 회사가 구성원들을 “생계형으로 장악했다”는 발언도 나왔고 경력사원 선발 과정에서 출신 지역을 봤다는 내용도 있다. 이 모든 것이 백 부사장이 2014년 3월과 11월 두 차례 극우매체 ‘폴리뷰’ 박한명 편집국장 등과 만난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녹취록은 지난해 1월 최민희 전 민주당 의원이 폭로했다.

녹취록에서 박 국장은 생방송 출연과 외주 제작 청탁, 내부 정보 제공 등을 MBC에 부탁했고 청탁은 박 국장의 ‘신동호의 시선집중’ 라디오 인터뷰 출연과 간판 토론 프로그램인 ‘100분토론’ 패널 섭외로 이뤄졌다.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이사장 고영주)는 ‘사석에서 나온 발언’ 정도로 치부하며 사생결단의 자세로 비호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사의 자유와 독립을 해할 수 있다”며 귀를 닫았다. 

검찰은 면죄부를 줬다.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방송법과 노동조합법 위반 혐의로 백 부사장을 검찰에 고발했으나 검찰은 지난해 12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 '백종문 녹취록'에는 당시 백종문 MBC 미래전략본부장이 최승호, 박성제 두 언론인을 이유 없이 해고했고 프로그램에 개입하는 내용이 담겼다. 사진은 당시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한 최승호 MBC 해직PD(왼쪽)와 박성제 MBC 해직기자. 사진=이치열 기자.
▲‘MBC 녹취록’에는 백종문 MBC 부사장이 최승호, 박성제 두 언론인을 이유 없이 해고했고 프로그램에 개입하는 내용이 담겼다. 사진은 당시 규탄 기자회견에 참석한 최승호 MBC 해직PD(왼쪽)와 박성제 MBC 해직기자. 사진=이치열 기자.
특기할 만한 것은 언론이었다. ‘MBC 녹취록’은 미디어오늘을 포함해 한겨레, 뉴스타파,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 일부 언론에서만 다뤄졌다. KBS, MBC, SBS 지상파 3사와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 언론은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왜 주류언론은 백종문 녹취록에 침묵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 공영방송을 조명한 논문이 있다. 지난 2월 한국언론정보학보에 실린 김상균 성균관대학교 미디어문화콘텐츠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 “MBC ‘백종문 녹취록’ 사건으로 본 공영방송의 위기”는 지난해 4~6월경 MBC 안팎의 언론인과 전문가 11명을 심층취재해 녹취록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는 까닭을 고찰했다.

MBC와 한 배를 탄 조선·중앙·동아

“우리나라 언론의 문제가 뭐냐면, 정치적으로 첨예한 이슈에 들어가면 언론이 보도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정치판 싸움에 뛰어들어가는 것 같아요. 뛰어들어가 오히려 정치적인 싸움을 선동하고 나서서 공격하기도 하고.”(최상훈 뉴욕타임스 기자)

지독한 침묵이었다. 지난해 1월1일부터 올해 3월6일까지 중앙·동아일보 지면에서 ‘백종문’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건 지난달 28일 ‘MBC 부사장’ 인사 소식뿐이다. 

조선일보의 경우 지난달 14일 “환노위 ‘28일 삼성 반도체 공장 백혈병 청문회’”라는 기사를 통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MBC 노조 탄압’ 청문회 의결 소식을 전하며 “작년 국정감사에서 특별한 사유없이 불출석한 백종문 MBC 전 미래전략본부장에 대한 고발도 의결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의 ‘튀는’ 이 보도 역시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이 조선일보 기자에게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관련 감찰 내용을 누설했다는 MBC 보도에 대한 ‘신경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전례에 비춰보면 언론사 간 실명 언급과 비판은 암묵적으로 금지돼 왔고 ‘MBC 녹취록’은 이를 뒷받침하는 적합한 사례다. 

김 연구원은 “여론을 좌지우지하면서 정치권력을 향유하는 당사자가 보수언론이나 주류언론”이라며 “그런데 이들이 자신들과 한 배를 타고 있는 MBC 최고 경영진의 흠결을 보도해 공영방송의 정당성을 훼손할 까닭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인터뷰 대상자들의) 공통적 의견”이라고 설명했다. 지독한 침묵은 한국 언론의 지독한 정파성에서 비롯했다.

논문 저자는 보수정권 들어 망가진 지상파 탐사 보도 프로그램을 ‘녹취록 무보도’ 원인으로 꼽기도 했다. “탐사보도 프로그램들이 최소한의 프로그램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지탱할 수 있었더라면 ‘백종문 녹취록’ 사건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공영방송사가 ‘낙하산’ 사장에 의해 침탈당하고, 그 사장들을 따르는 중간 간부들에 의해 탐사보도 프로그램이 장악되면서 공영방송사의 권력 감시 기능은 점점 더 무력화해갔다.”

▲ 백종문 MBC 부사장. 사진=MBC
▲ 백종문 MBC 부사장. 사진=MBC
공영방송 탐사 보도 프로그램들이 언론사를 도마 위에 올리며 권력 감시 기능을 발휘한 보도로 2006년 삼성 기사 삭제로 발발한 시사저널 파업 사태를 꼽아볼 수 있다. 당시 MBC ‘PD수첩’은 2007년 “삼성공화국, 언론은 침묵하라?”, “기자(記者)로 산다는 것” 편을 통해 두 차례 시사저널 사태를 다뤘다. 

시사저널 파업에 참여했던 고재열 시사IN 기자는 2008년 자신의 블로그에 “두 번의 방송으로 편집권 독립을 위한 ‘시사저널 파업’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고 ‘시사IN’ 창간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PD수첩은 2008년 10월 MB정부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을 하다가 YTN 언론인들이 해직을 당하자 “YTN, 마이크 빼앗긴 기자들” 편을 내보냈다. 

이와 함께 독재정권에 부역한 자사 보도는 물론 족벌언론의 편향성을 가차없이 꼬집던 KBS ‘미디어포커스’ 등 보도 비평 프로그램들도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대폭 축소·폐지됐다. 언론사 간부들의 치부와 비리를 고발하는 토대가 사라진 셈이다. 

논문에서 최승호 전 MBC PD는 “주류 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조중동, 공영방송”이라며 “공영방송은 다 (권력에) 잡혀 있는 상태고 조중동도 마찬가지로 정파적 관점에서 보도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진영논리 방문진과 관리실패 방통위

김 연구원은 언론에 이어 방문진을 주목했다. 방문진은 MBC 대주주로서 MBC를 관리·감독할 책임이 있는 공적 기구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지칭하는 공안 검사 출신 고영주 이사장과 여당 추천 뉴라이트 인사들이 포진해 진영 대립을 강화시키고 MBC 정상화를 가로막는 대표적 요인으로 꼽힌다.

논문에서 야당 추천 이완기 이사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한마디로 진영논리입니다. 진영의 논리라는 건 군사 문화. 전투가 벌어졌을 때 무조건 이겨야 하지요. 승패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가치지요. 그러다 보니까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자유, 평화, 평등, 정의라든가 부끄러움, 도, 예의라든가 이런 게 다 묻혀버리는 거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방문진에서 ‘MBC 녹취록’ 진상규명은 뒷전이고 특정 정치세력과 일부 ‘좌파’ 매체들이 한 몸이 되어 선량한 MBC 직원을 선동시키고 있다, 따위의 회사 해명이 더 우선순위다. 

최원형 한겨레 기자는 논문에서 “(MBC 보도자료 등은) 상식적으로 접근해도 잘못된 얘기라는 걸 알 수 있다”며 “방문진이나 소수 MBC와 관련된 정책 결정을 하는 집단이나 국회, 이런 분들에게 근거로 활용되는 게 아닌가. 정파적인 대립 지형이 있으니까 이쪽에서 주장하는 것을 순화시키거나 무화시키기 위해서 끌어다 쓸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는 고 이사장의 특성을 짚기도 했다. 최 기자는 “고 이사장은 회의 때마다 개인의 자유권에 매우 집착해서 MBC가 공영방송이라는 사실 자체를 별로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며 “백종문 본부장이 공인의 신분일 수 있다는 점을 별로 인식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줬다. ‘폴리뷰’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가)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공영방송을 관리·감독하는 공적 기구의 수장으로서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그들만의 ‘거래’를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다. 이용마 전 MBC 기자는 “폐쇄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 이외에 따로 (본부장을) 시킬 사람이 없다”며 “적은 인재풀을 가지고 운용하다보니 굉장히 폐쇄적인, 쉽게 말해 자기들만의 거래가 이뤄진다. 제가 볼 때는 그 과정에 부정부패한 거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통위의 직무유기도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상훈 기자는 논문에서 “한국 규제기관 위원들이 규제기관 위원으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규제위원으로 만들어준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를 결정 과정에 잘 반영시키고 있다”며 “공권력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는 게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진단했다.

김 연구원 역시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방송규제기관이 이 사안을 회피하는 것은 지극히 정파적인 판단이다. 진영 논리에 빠져 규제기관으로서 해야 할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드세다.” 

최성준 방통위원장은 녹취록이 폭로됐을 때부터 “방송법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지금 구체적으로 할 것이 없다”, “방통위 입장에서 (MBC 내부 상황을) 면밀히 살피는 것은 방송사들의 자유와 독립을 침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국회 상황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24일 예정된 MBC 노조 탄압 청문회는 야당 단독 의결로 성사됐으나 이에 반발한 자유한국당이 국회 일정을 보이콧하며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MBC 불법 경영 책임자, 형사 처벌해야”

김 연구원은 공영방송사 내 대항 세력이 붕괴됐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명백한 언론탄압 물증이 드러났음에도 수년째 지속된 권력의 폭거로 내부 저항은 예전 같지 않다. 

언론운동 진영의 큰 축인 언론노조 MBC본부는 공정방송조항을 보장한 단체협약을 통해 공정방송을 실현해왔다. 과거 ‘황우석 논문 조작’ 특종도 ‘국장책임제’ 하에서의 성과물이었다. “편성·보도·제작상의 실무책임과 권한은 관련 국·실장에게 있다”는 단체협약의 한 구절이 갖는 힘이었다.

이 같은 권력의 개입을 사전 차단할 수 있는 장치들이 허물어지며 MBC 기자·PD들은 권력과의 충돌을 맨몸으로 겪어내고 있다. 계속되는 언론 탄압에 조직 내 DNA는 뒤바뀌었다. 

▲ 지난해 2월18일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동대책위원회’는 방송문화진흥회 정기이사회에 앞서 서울 여의도 방문진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백종문 녹취록’ 진상규명과 안광한 사장 해임을 촉구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지난해 2월18일 ‘MBC를 국민의 품으로! 공동대책위원회’는 방송문화진흥회 정기이사회에 앞서 서울 여의도 방문진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백종문 녹취록’ 진상규명과 안광한 사장 해임을 촉구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김 연구원은 “MBC의 경우 출신 지역과 가치관이 (사측에 의해) 검증된 경력사원이 대규모 충원됨으로써 기자나 PD가 ‘회사형’으로 변화한 조직문화의 확산은 그만큼 더 빠를 것”이라며 “살아남기 위한 투쟁으로 사장과 임원진들을 위한 ‘생계형 호위무사’가 된 기자들. 권력이 불편해할 수 있는 아이템을 방송에서 다룬다는 건 그만큼 더 멀어졌다. 더 엄격한 ‘자기 검열’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라고 했다. 앞서 언급한 “생계형으로 장악했다”는 발언은 정권 부역 세력이 비판 언론인을 굴종시킨, 언론장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김 연구원은 “공영방송사에서 불법적 경영이나 업무상 배임 등에 대해서는 엄혹하게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는 불법적인 권력을 휘두르거나 인권을 탄압하면서 권위주의 체제에 굴종했던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에 대한 처벌이 여태 없었다. 이 때문에 이명박·박근혜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언론인들은 국정원, 검찰, 국세청 등의 권력기관에 의해 종북으로 몰리거나 ‘밥그릇’을 빼앗기는 ‘신종 독재’를 겪으면서 각자도생의 삶을 강요당해왔다. 구조적 통제 하에서 ‘악의 평범성’이 내재화되는 세상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20대 국회에서 백 부사장을 청문회에 세우는 일이 시급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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