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이면서 가장 희극적인 장면을 통과하고 있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 바실리오홀에서 스웨덴 스칸디나비아정책연구소 최연혁 소장과 서강대학교 철학과 최진석 교수를 초청해 좋은 국가와 좋은 정부의 조건, 그리고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당장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할 것인가가 최대 관심사지만 더 중요한 건 박근혜를 끌어내린 이후다. 단순히 다음 대통령을 잘 뽑으면 되는 문제일까. 근본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고민하고 무너진 국가 시스템을 어떻게 다시 설계해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이 필요할 때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기 원하는가, 우리가 원하는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할 때다.

최연혁 소장은 지난 6월 출간한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아무리 강한 국가라 해도 나쁜 정부가 있으면 쇠퇴의 길을 갈 수밖에 없고, 반대로 국가는 스스로 일어설 능력이 없지만 좋은 정부만 있으면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됐다”고 강조한 바 있다. 최 소장은 이날 대담에서도 “위기를 겪지 않은 나라는 없다”면서 “중요한 것은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배신감은 내가 사는 이 사회가 태어나면서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는 사회, 가난과 실패가 대물림되는 사회, 조금 더 가진 자가 끊임없이 갑의 위치에서 국민을 업신여기는 사회,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능력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회, 똑같은 안전사고가 반복되는 사회,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사회, 병역 같은 의무만 강조되고 국민의 인간답게 살 권리는 묵살되는 사회, 정치인이 권력에만 몰두하는 사회, 병역의 의무는 힘없는 사람만 진다는 허탈감과 패배감이 강한 사회, 정직하게 살면 손해를 볼 것 같은 사회, 내 자식도 나처럼 실패자로 살 것 같은 강박감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이민이나 자살밖에 다른 퇴로가 없을 것 같은 사회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때 증폭된다. 이 같은 절망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최 소장이 내놓은 해법은 간명하다. “답은 신뢰다.”

▲ 지난 3일 열렸던 박근혜 퇴진 6차 촛불집회. 사진공동취재단.
최 소장이 책에서 소개한 좋은 국가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효율적인 정부, 둘째,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국민이 목말라 하는 부분을 책임있게 수행하는 능력, 셋째,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발생하는 폭력적 갈등을 해결해 국정의 안정을 확보하는 것, 넷째, 사법의 질. 가진 자가 더 많은 이익을 보는 사회에서 국민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법치국가의 작동 여부, 그리고 여섯째, 부패의 통제 등이다.

스웨덴은 1938년 살트셰바덴 협약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복지국가로 가는 초석을 닦는다. 노동자총연맹(LO)와 경영자총연합회(SAF)가 살트셰바덴 호텔에 모여 노동조합이 파업을 자제하는 대신 산별 교섭을 제도화하고 기업은 일자리 창출과 기술 투자를 확대하는 등의 합의를 끌어낸 것이다. 스웨덴은 살트셰바덴 협약 이후 연대임금제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렌-마이드너 모델 등을 통해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시스템의 기반을 만들었다.

최 소장은 “살트셰바덴 협약이 체결되기까지 과정은 험난했다”면서 “자본과 노동이 적대적 관계로 치달았고 노동조합이 법적인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파업을  하면 경찰이 아닌 군대가 동원돼 총을 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931년에는 임신부를 포함해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파업이 계속돼 파업 금지법을 만들 정도였다.

“당시 사회민주당 의석이 45%였는데 우파에 손을 내밀어 농민당과 손을 잡고 57%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그렇게 단독으로 법을 만들 수 있게 된 다음 사측 대표들과 만나 제안을 한 것이다. 사측도 이대로 가면 직장폐쇄 금지법을 만든다고 하니까, 사자의 이빨을 뽑는 건데, 양측 모두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2년 동안 계속해서 만나서 깨지고 만나서 깨지고 하다가 겨우 타협을 이룬 게 살트셰바덴 협약이었다.”

사회민주당은 노조와 혈맹 관계였지만 노조에 과감하게 쓴 소리를 했다. “기업이 없으면 국가경제가 없고 일자리도 없어진다.” 기업에도 “노조와 기 싸움하지 말고 타협에 임해 달라”고 요청했다. 최 소장은 “노사가 대타협을 이룬 것처럼 알려졌지만 그 과정에 정치력이 작동했던 것”이라며 “노조가 반대할 때도 이번만 믿어달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테이블에 끌고 나왔기 때문에 타협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샬트셰바덴 협약을 맺기 전 스웨덴은 유럽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였다. 불황과 파업으로 몸살을 앓았고 굶주림에 못 이겨 국민의 3분의 1에 이르는 150만명이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나기도 했다. 기업들은 동유럽의 공산화 물결이 스웨덴을 휩쓸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노동자들은 산별노조 도입을 전제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본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스웨덴 모델을 단순 이식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의 정치적 상상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주의 이론가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몇 십년 몇 백년 뒤에 찾아올 낙원을 준비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낙원은 인류 역사의 시작에도 없었고 마지막에도 없을 것이다.” 비그포르스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지 않고 사회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으며 완전고용과 복지야말로 생산성 향상의 중대한 조건”이라고 보고 국가 차원의 경제 계획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나온 게 렌-마이드네르 모델이다.

최 소장이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처럼 복지를 원하거든 경제성장을 위한 친 기업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언뜻 진보진영에서는 쉽게 수용하기 어려운 주장이지만 “고용창출이 없으면 성장을 이룰 수 없고 경제성장이 따라주지 않은 상태에서 세금을 인상하기만 하면 기업경쟁력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최 소장의 주장이다. 진보 vs 보수의 획일적 구분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최 소장이 이날 강조한 것은 스웨덴의 복지국가 시스템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국민연금 개혁에 손도 못 대고 있는 한국과 달리 스웨덴은 1957년 국민투표를 통해 모든 연금을 하나로 통합하고 고용주세로 부과하기로 합의를 끌어냈다. 임금의 34.6%를 기업이 연금으로 부담한다. 실업 수당 등도 여기에서 나온다. 최 소장은 “기업이 참여하지 않으면 국민들만으로 분배를 이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최 소장은 2012년 출간한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에서 “공동체 의식과 높은 관용, 낮은 갈등 수준, 투명성, 타협과 협의의 정신, 연대의식 등이 정의로운 사회의 필수 요소”라고 강조했다. 최 소장은 스웨덴을 “믿음과 실천으로 움직이는,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나라”라고 소개했다. 최 소장은 “지금 우리에게는 미래를 내다보고 정책을 내놓고 책임일 수 있는 정당이 필요하다”면서 “정치가 제대로 돼 있다는 나라들은 정당이 그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1944년 강령에서 세 가지 원칙을 세운다. 첫째, 완전 고용, 둘째, 공정한 분배와 생활 수준의 향상, 셋째, 민간 부문의 효율성 상승과 민주주의의 확장 등. 스웨덴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소득세와 법인세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그만큼 국가와 정부에 대한 신뢰가 뒷받침돼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소득세율은 평균 31%에 이른다. 최고세율은 60%, 최저세율도 29%나 된다. 한국은 최고세율이 33%, 최저세율은 6% 밖에 안 된다.

“지금은 낮아졌지만 스웨덴의 노조 조직률은 여전히 90%가 넘는다. 노조 내부에서 왜 임금 격차가 이렇게 크냐는 문제의식이 나오고 머리를 맞대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가자는 제안이 사회적으로 합의에 이르기까지 노조의 사회적 책임성과 연대 의식이 없었다면 지금의 스웨덴 모델은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노동운동이 사회 변화의 한 축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최 소장은 “당대의 위기를 넘어 질서를 잡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성숙한 시민의 역할”이라면서 “정치적 질서와 함께 시민적 지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민이 바뀌지 않으면 정치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최 소장은 “국가의 실패는 정치의 실패에서 비롯하지만 위로부터 변화가 진행되지 않으면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가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소장은 “민주주의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 그리고 그걸 잡아주는 건 감시”라면서 “스웨덴의 경우 감사원이 행정부 산하에 있다가 2001년 감사원이 의회로 옮겨갔는데, 권력 분점의 측면에서 국회로 가면 문제가 되겠지만 대통령과 의회까지 감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임기를 7년으로 늘려 정권이 바뀌어도 영향을 받지 않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최순실 국정농단도 감사원만 제대로 작동됐더라도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설명이다.

최진석 교수는 “아무리 좋은 제도를 들여와도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면서 “제도와 사람, 제도와 문화, 제도와 철학 사이에 갭이 생기고 언밸런스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정치인들이 국민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지역감정을 부추기면 휘둘리고 선동하면 말려들고 포퓰리즘하면 따라가고 정치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 때문”이라면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정치적 상상력, 정치인들이 못하면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많은 국민들이 내가 각성하지 않으면 무당이이 설치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면서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 방관자가 아니다, 이런 각성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국민이 바뀌지 않으면 정치가 바뀌지 않는다”면서 “삶의 정치와 일상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 능력은 철학의 가장 높은 단계”라면서 “제도만으로는 안 되고 일상의 운동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연혁 소장은 스웨덴 쇠데르턴대 정치학과 교수를 지내고 스톡홀름 싱크탱크인 스칸디나비아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쇠데르턴대에서 18년간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버클리대학 사회조사연구소 객원연구원, 하와이 동서연구소에서 초빙연구원으로 일했다. 최진석 교수는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인문·과학·예술 분야 인재 육성기관 건명원의 초대 원장을 맡고 있다.

이정환 기자 bl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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