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서울에서 100만 명이 넘는 대규모 촛불집회를 지켜봤습니다. 가슴이 벅차게 끓어올랐습니다. 다시 한 번 광화문 집회 현장으로 돌아가 시민들과 함께 숨쉬고 외치고 노래 부르고 부딪치고 싶습니다. 언론인으로서 뜨거운 피가 다시 충만하게 끓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다만 현재 일이 많고 시간이 부족합니다. 대신 타이페이 교실이나 TV, 강연 무대 등에서 학생과 시청자를 상대로 한국 정국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언론을 통해 알게 된 최신 상황을 한국의 역사적 배경과 하나씩 엮어 대중들이 흥미를 느끼도록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국 상황에 대해 흥미를 느끼면서도 어리둥절해 합니다.
4년 전 박근혜 대통령 당선 그날, 대부분 대만 매체는 한국인들이 여성 대통령 탄생을 환영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저는 ‘독재자의 복귀이자 한국 비극의 시작’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런 예언에 대해 대만의 ‘공영방송’(公共電視, Public TV Service) 이외 어떠한 주류 채널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4년이 지난 후 ‘박근혜 게이트’(朴槿惠門 )가 열리자 학생과 시청자들은 ‘정말 주 선생님은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지자는 늘 고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저는 1980년대 중반 한국 민주화 운동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이 최고조에 달한, ‘6·10 범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던 그날 오후 6시, 저는 현 서울 시의회 앞길에 있었습니다.
이른 오후 저는 먼저 장충체육관에서 거행되는 집권당 노태우 후보자의 지명 대회를 취재했습니다. 지명 대회가 끝난 이후 체육관을 나와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서 시위 인파를 보게 되었습니다. 두 장면은 크게 대비됐습니다.
저와 함께 취재를 했던 일본 ‘요미우리 신문’ 서울 특파원 야마오카 쿠니히코(Yamaoka Kunihiko, 山岡邦彥)는 비슷한 또래의 동료였습니다. 우리는 거리의 젊은이들과 함께 흥분했습니다.
우리는 최루탄 가스를 피해 다니며 취재했습니다. 외신기자로서 이런 대규모 집회를 생전에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6월 항쟁 취재는 기자 생활 중 가장 가치있고 기억에 남는 경험이었습니다.
노태우의 6·29선언 발표 이후 모든 항쟁은 하루밤 사이 잠잠해졌습니다. 87년 7월9일 이한열 영결식 취재 이후 저는 연세대학교 교문 앞에서 평생 기억에 남을 사진을 남겼습니다. 방독면을 쓰고 찍은 이 사진은 가장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최루탄도 잊지 못합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주말 가두 시위가 있었습니다. 저는 서울시청에서 프레스센터까지 걸어가던 중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을 오른쪽 팔에 맞았습니다. 땅에 떨어졌지만 폭발하지 않아 최루탄을 주워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전리품’으로 TV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후 한국과 일본 기자들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한 한국 기자는 TV 위에 올려놓은 최루탄을 발견하고 대경실색하며 말했습니다. “주 형, TV가 뜨거워져서 최루탄이 폭발하면 앞으로 3개월 동안 집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비로소 심각성을 느끼고 이튿날 최루탄을 경찰에 돌려줬습니다.
그런데 한국 최루탄 성능은 정말 좋았습니다. 1987년 7월 하순 시간을 내어 집 근처 잠원동 세차장에 갔습니다. 세차장 직원이 차량 트렁크를 열며 기분 나쁜 듯 제게 물었습니다. “방금 최루탄 발포된 곳에서 왔어요?”라고 물었고 저는 “1개월 전 이후로는 최루탄을 맞은 적은 없었는데”라고 말했습니다. 한국 최루탄이 품질이 좋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대만 언론인 가운데 저처럼 6·10 항쟁 최일선을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이후 ‘어떻게 취재의 위험을 피하는가’라는 글을 작성했고 현재 각 대학 신방과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삼 30년 전 기억이 떠오른 까닭은 이번 박근혜 게이트에 분노하는 대규모 촛불 집회에 있습니다. 30년 전과 지금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시위 항쟁 수단이 진보했습니다. 문명화했습니다. 30년 동안 민주주의 경험으로 격렬함과 충돌이 사라졌습니다. 과거엔 돌, 나무 방망이와 화염병으로 경찰을 공격했지만 지금은 ‘촛불’로 바뀌었습니다. 촛불은 평화를 상징합니다. 물론 시민의 구호는 정부에 대한 분노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시위대의 이성적인 모습은 민주와 문명 진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뒤를 이어 ‘양김’(兩金)과 노무현 정권의 ‘문인 지역 정치’(文人地域政治) 시대 이후 다시 이명박과 박근혜의 ‘문인 독재 정치’(文人獨裁政治)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독재(獨裁)→지역(地域)→독재(獨裁)로 회귀한 것입니다.
박근혜는 독재자 아버지 박정희 옆에서 보고 배웠습니다. 국민들은 박정희가 제정한 ‘유신헌법’(維新憲法) 등 장기 독재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박정희는 ‘긴급조치’(緊急措置) 제1호부터 제9호에 기댔습니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제9호 긴급 조치 치국 시대’(第九號緊急措置治國時代)였습니다.
지금은 1987년보다 더 엄중한 시기입니다. 시위에 참여하는 인원이 역대 최대 규모입니다. 이번 촛불집회에는 노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 계급, 영역을 나누지 않고 모두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러한 ‘전 국민의 분노’(全民的憤怒)는 궁정 출신 박근혜가 체험한 적 없는 분노입니다. 아울러 이번 사건은 한국이 여전히 봉건 왕조 시대, 독재 여왕의 통치에 귀속돼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한국 국민은 30년 전 피눈물의 항쟁을 겪으며 가까스로 민주 정치를 쟁취했습니다. 그러나 과거 사고에 빠진 반민주적 지도자의 통치로 인해 독재로 회귀했습니다. 누가 박근혜의 역행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했는지 한국인들은 이에 상응하는 사고와 반성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