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가 지난 17일 공개한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 비망록은 청와대가 KBS에 개입한 정황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다. ‘김영한 비망록’은 김 전 수석이 2014년 6월14일부터 2015년 1월9일까지 청와대에서 일하며 남긴 것이다. 이 가운데 KBS 관련 부분은 박근혜 정권이 공영방송에 대해 어떠한 논의를 해왔는지 드러내는 자료로 가치가 있다. 비망록에는 2014년 6월15일부터 10월15일까지 넉 달 동안 17번에 걸친 KBS 관련 기록이 있다.

“KBS 상황, 파악, plan 작성”

먼저 2014년 6월15일자 메모에는 “6/18(수) KBS정기이사회-사장 임명 논의(7/10까지는)”, “KBS 이길영 이사장 *선, 배수, 움직일 수. 학교. 동기生”이라고 적혀 있다. 이보다 앞서 6월10일 청와대는 길환영 KBS 사장을 해임했다. 한 달 전인 5월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은 청와대와 길 사장의 보도 개입을 폭로했고 KBS 이사회는 6월5일 해임 제청안을 표결에 부쳐 가결시키는 등 2014년 6월은 KBS를 둘러싼 상황이 급변하던 시기였다.

6월16일자 메모는 보다 구체적이다. “홍보/미래 KBS 상황, 파악, plan 작성”이라고 적혀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길환영 사퇴 이후 KBS 사장 선임에 대한 계획을 작성하라고 홍보 및 미래전략수석에게 지시한 의혹”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은 YTN 출신 윤두현 수석이었고 미래전략수석은 윤창번 수석이었다.

사추위 제안? “수용 곤란”

사장 선임을 위한 KBS 이사회를 이틀 앞둔 6월16일, 제1노조인 KBS노동조합과 언론노조 KBS본부 양대 노조는 물론 KBS 사내 직능단체들은 공정한 사장 선임을 위해 특별다수제와 사장추천위원회 등을 요구했다. 청와대는 이러한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비망록 6월17일자 메모는 “KBS노조. 16개 직능단체/ -사장선임절차 제의/ -공영방송 영.독.일/ -수용곤란/ *사추위(김인규 사장) - 여야 안분/ 방통위원장과 상의”였다. 청와대가 공영방송 사장 선임과 관련해 외국 사례 등을 검토하고 ‘수용 곤란’이라는 입장을 정한 뒤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과 의논토록 지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KBS 구성원들의 제안은 6월30일 열린 KBS 이사회에서 여당 추천 이사들의 반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이어진 6월20일자 메모 “2012년 KBS 파업사건-법원 무죄선고/ -노조강성화 가속”의 경우는 청와대가 언론노조 KBS본부 동향을 감시한 정황으로 풀이되고 있다.

▲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


KBS 이사회는 6월30일 사장 공모를 마감했다. 길 전 사장의 후임으로 KBS 사장이 되는 당시 조대현 전 KBS미디어 사장, 홍성규 전 방통위 상임위원, 강동순 전 KBS 감사, 고대영 전 KBS 보도본부장 등 30여 명이 공모에 지원했다. 7월2일 KBS 이사회는 이들 중 6명을 후보자로 압축했는데, 전날인 1일자 비망록에는 “KBS 사장 선출 관련”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6명으로 압축하기 하루 전에 청와대에서 후보 정리와 관련한 대응이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7월3일자 비망록에는 “KBS 6명-조대현 7”이라고 기록돼 있고, 7월4일자에는 “KBS 이사 우파 이사-성향 확인 要”라고 적혀 있다. 7월4일자 기록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워딩으로 알려져 있다. KBS 보도․인사 개입 논란으로 청와대가 직접 KBS에 개입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김 전 실장 워딩은 당시 조대현 후보자로 기우는 KBS 여당 추천 이사들이 누구인지 청와대가 확인에 나선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할 수 있는 대목이다.

KBS 이사들에 대해 “면종복배”?

흥미로운 것은 7월11일자 기록이다. 이날에는 “부처-정상화·공공기관 개혁-면종복배”라는 메모가 있고 그 공공기관으로 “KBS 이사”를 지칭해 표기했다. 조대현 후보자는 이틀 전인 7월9일 KBS 이사회에서 차기 사장으로 내정됐는데, KBS 여당 이사 가운데 2명이 조 후보에 투표해 여당 표가 분산됐다. KBS 이사회 11명 이사 가운데 야당 이사 4명을 포함해 6명이 조 후보자를 지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에서 ‘반란표’를 던진 KBS 여당 이사들을 ‘면종복배’(겉으로는 복종하는 체하면서 내심으로는 배반한다는 뜻)하는 사람들로 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느닷없이 사의를 표명한 이길영 전 KBS 이사장이다. 이 전 이사장은 8월27일 ‘일신상의 이유’를 들어 KBS 이사장에서 사퇴했다. 방통위는 속전속결로 이틀 뒤인 8월29일 ‘뉴라이트 인사’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를 KBS 이사장으로 내정했다. 이에 조대현 후보자를 사장으로 내정한 데 대한 문책성 인사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최근 이 전 이사장이 자신들에게 ‘최성준 방통위원장으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고 사표를 제출했다’고 증언했다고 밝혔다. 최 위원장은 17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당시 이 전 이사장을 뵌 적은 있지만, 이 전 이사장이 먼저 사의를 표명했다. 사퇴를 요구한 적 없다”고 밝혔으나 이 전 이사장은 “노코멘트”라며 외압설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2014년 10월15일자 비망록에는 “KBS 이사장 선정 과정 BH 개입”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전날 문병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방통위 국정감사에서 이인호 KBS 이사장 임명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해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


“전사들이 싸우듯이”

비망록에는 청와대가 인사뿐 아니라 보도도 통제하려 한 정황이 나타나 있다. KBS ‘뉴스9’은 2014년 6월11일 톱뉴스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의 교회 강연 영상을 단독 보도하면서 그가 “일본 식민 지배는 하나님 뜻” 등의 발언을 했다고 밝혔다. 청와대가 길 전 사장을 해임한 다음날 보도된 리포트였다. 이 보도는 문 후보자가 국무총리 후보직을 사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박근혜 정부는 ‘인사검증 실패’라는 치명적 내상을 입었다.

7월2일자 비망록에는 “문창극 KBS 보도-중징계-방심위”라고 적혀 있다. 전날인 7월1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특별위원회가 KBS의 문창극 검증 보도에 대해 ‘중징계’ 의견을 낸 것을 주시한 것으로 보인다. 8월28일자 비망록에는 “방심위, KBS보도(문창극)-전체회의에 회부”라고 쓰여 있는데, 이 역시 전날인 8월27일 방통심의위가 KBS의 문창극 보도를 전체회의 안건으로 상정한 것과 관련 있다. 

9월5일자 비망록에도 “방심위, 문창극 관련 지도”, “전사들이 싸우듯이 ex 방심위 KBS 제재심의 관련”이라고 적혀 있다. 후자는 김 전 실장의 워딩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전날 방통심의위의 KBS 문창극 보도 관련 행정지도를 예로 들며 전사들이 싸우듯이 정권을 위협하는 언론보도에 적극 대응할 것으로 주문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방통심의위에서 KBS 보도에 법정제재가 아닌, ‘권고’라는 행정지도를 내린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방통심의위는 9월4일 KBS 문창극 보도에 대한 심의를 진행했다. 당초에는 방통심의위 의결 구조가 여야 6대3인 점을 감안해 중징계인 ‘관계자 징계’(벌점 4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됐으나 결과는 전원합의 ‘권고’였다. 정부·여당 추천 윤석민 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은 다른 여당 위원들이 ‘관계자 징계’ 의견을 낼 때 ‘주의’(벌점 1점) 의견을 내며 이견을 보였다. 이날 방통심의위는 4시간 30분을 넘는 회의 끝에 ‘권고’에 합의하며 합의제 취지를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KBS 보도·인사 개입의 핵심 당사자로 떠오르고 있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이 남긴 비망록에는 그의 지시 사항이 기록돼 있다. (사진=연합뉴스)
방통심의위 외압 없었을까?

하지만 그로부터 3개월여 뒤 윤 위원이 돌연 사퇴의사를 밝혀 논란이 일었다. 잔여임기가 2년 6개월 남은 시점이라 사퇴 사유에 대한 궁금증은 컸다. 당시 윤 교수는 “정치적인 이유는 전혀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이번 비망록을 통해 청와대가 KBS 보도 제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사실이 드러난 만큼 그의 사퇴는 여전히 의문점이 있다. 윤 교수는 22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방통심의위가 하수인처럼 움직이는 부도덕한 조직은 아니”라며 “당시 나는 양심에 따라 행동했고 다른 위원님들도 믿는 바에 따라 (위원으로) 활동하셨다.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남아있는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말했다. ‘외압 논란’과 관련해서는 “내가 일신상의 이유라고 밝힌 만큼 그 이야기는 넘어갔으면 한다”며 말을 아꼈다.

청와대는 문창극 보도뿐 아니라 ‘추적60분’의 천안함 편도 주목했다. 2014년 6월26일자 메모 중 “KBS 추적60분 천안함 관련 판결–항소”라는 대목이다. 이는 2010년 천안함 침몰사고와 관련해 민·군 합동조사단 최종 보고서의 의문점을 다룬 KBS ‘추적60분’ 방송분에 대한 방통위의 경고(중징계) 처분은 위법하다는 법원의 1심 판결 내용으로, 실제 방통위는 7월2일 서울고법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이 기록은 김 전 실장의 워딩을 그대로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8월14일자 메모인 “KBS, VIP 행적 보도”도 8월13일자 KBS ‘뉴스9’에서 청와대가 세월호 국정조사특위에 밝힌 세월호 당시 대통령 행적이 보도된 것을 주시한 기록이다.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에 청와대가 민감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