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20만 명이 모인 서울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는 그 어느 집회보다도 평화로웠다. 

5일 오후 4시부터 진보진영 시민사회단체 연대체인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준)’이 주최한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 문화제에선 경찰이 시민 행진을 저지하지도, 물대포가 등장하지도 않았다. 

이날 범국민행동 촛불문화제 1부가 오후 6시에 끝나고 행진이 시작됐다. 행진은 광화문우체국에서 종로2가-안국로터리-종로1가 등을 거쳐 교보문고까지 가는 경로와 종로3가에서 을지로3가-시청-대한문을 거쳐 광화문 일민미술관으로 도착하는 두 경로로 진행됐다. 




문화제와 행진에 참여한 시민 규모는 주최 측 추산 20만 명, 경찰 추산으로도 4만5000여 명에 달했다. 이는 지난 1차 범국민행동(2만여 명)보다 10배 가까이 많은 인원으로, 당초 경찰은 집회 통제의 어려움을 우려해 행진을 불허했다. 

하지만 서울행정법원은 이날 “집회 신청인인 참여연대 측이 이 사건 집회·시위로 인한 교통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300명의 질서유지인을 배치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신청인은 1주일 전에도 유사한 성격의 집회·시위를 개최했으나 큰 혼란 없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됐다”고 집회금지 통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경찰은 집회 참가자의 도로 행진은 허용하되, 시위대의 청와대 방향 진입을 막기 위해 광화문 세종대왕상 뒤편에 차벽을 설치했다. 경찰이 우려했던 시위대의 폭력 행동이나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시민들의 행진 대열은 질서정연했다. 지난해 12월5일 열린 2차 민중총궐기에서처럼 경찰의 무리한 집회 통제가 없는 과격 시위 역시 기우에 불과했음이 또한번 증명된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시민들은 양 손에 하나둘 촛불을 밝히기 시작했고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등 구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전례 없는 최순실 국정농단 정국에서도 시민들의 분노는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이날 행진과 문화제에선 자녀와 함께 나온 부모들과 손을 잡고 참석한 젊은 연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도 곳곳에서 목격됐으며 ‘하야하라 박근혜’, ‘새누리도 공범이다’는 등 피켓을 들고 웃으며 구호를 외치는 청소년들도 많았다. 떠난 자리에 쓰레기를 스스로 치우는 성숙한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5일 오후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2차 범국민행동’ 문화제 현장.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주최 측의 촛불 문화제도 자유롭고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가수들의 공연과 무대행사가 펼쳐졌고 시민사회 각계각층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삼성반도체 공장 백혈병 피해자인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도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 화나죠? 나도 너무 화나 죽을 것 같아 이 자리에 올라왔다”며 “삼성반도체 공장과 LCD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암에 걸리고 죽으면서 가정이 해체되는데도 무시했던 삼성이 최순실과 그의 딸 정유라에겐 수십억을 갖다 바쳤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분개했다.

황씨는 박 대통령이 총리로 지명한 김병준 교수에 대해서도 “김병준씨는 대표적인 삼성맨으로 전 국민의 재앙이 될 의료민영화를 앞장서 추진한 장본인”이라며 “박 대통령은 국민을 우롱하지 말고 당장 퇴진하라. 최순실을 구속하고 부당한 이득을 취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엄정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지금 대통령 퇴진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해결로는 이뤄질 수 없고 오직 국민의 깨인 의식만인 여태까지 우리를 압제해 온 모든 권력을 거둬낼 수 있다”며 “여러분의 의지가 강력히 표출될 때만이 우린 새로운 역사 쓸 수 있다. 우리는 혁명을 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혁명하고, 우리의 제도를 혁명하고, 우리의 의식을 혁명하고, 이 모든 우리의 압제를 혁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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