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래갈래 찢어진 검은 종이가 하늘에 휘날렸다. 18일 오전, 세월호 천막이 설치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맨발의 양혜경 스님이 선보인 넋전춤은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엄숙하지만 절도있는 동작으로 검은 색 종이를 하늘을 향해 흔들던 양혜경 스님은 종이 조각에 불을 붙였다.

양혜경 스님은 “공기 속에 가득한 탁한 것들을 모두 태워버리고 싶었다. 검은 색은 물의 의미를 담고 있다. (블랙리스트와 같은) 검고 탁한 나쁜 것들을 씻어내고자 했다”고 춤의 의미를 설명했다.

▲ 블랙리스트 사태를 규탄하는 의미를 담은 기원춤을 추는 민족춤협회 회원 뒤로 멀리 청와대가 보인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춤과 음악, 미술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 100여명이 18일 오전 광화문 광장으로 모였다. 최근 세월호 진상규명 선언 등 사회적 발언을 했던 문화예술인 만여명에 대해 정부가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이들에 대해서는 정부의 재정지원을 선별적으로 했다는 폭로가 제기된 것에 대한 반발의 의미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반정부’ 인사로 분류된 문화인들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이를 문화체육관광부로 내려보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날 삼삼오오 모인 문화예술인들은 예술인을 탄압한 정부에 대한 저항의지를 예술로써 표현했다. 이하 작가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풍자 그림을 선보였고 미술가 임옥상씨도 검은 옷에 운전면허증을 붙이고 블랙리스트를 규탄하는 행위예술을 했다. 민족춤협회도 블랙리스트를 의미하는 검은 옷을 입고 세월호 노란 리본을 상징하는 노란 천을 몸에 두르는 춤을 선보이는 등 블랙리스트 사태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표현했다.

▲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기자회견 및 예술행동에 참가한 미술가 임옥상씨. 사진=이치열 기자.
김창규 나눔교회 목사도 “문학의 본질은 비판이다. 삶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고 인권과 생명, 평화, 통일을 주장하고 표현하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다. 이런 것을 아예 막는 것은 박정희·전두환정부 때보다 더 어두운 시대”라고 비판했다.

문화예술인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재정지원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주변에서 그러한 사례가 있었다는 경험담도 전했다. 한 민족춤협회 회원은 “실제로 공연이나 집회할 때 경찰이 공연에 따라다니기도 하고, 오늘도 나오셨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정부로부터 (이상하게)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주변 예술인 분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고 의견을 전했다.

유연복 화가는 “80년대에도 이런 일들이 많았다.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전시였는데 작품을 철거하고 벽화를 치우는 등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에 대해 탄압을 받았던 경험이 있다. 그 뒤로 아예 정부 지원 요청 자체를 하지 않았었다”면서도 “요즘에는 특히 문학이나 연극 분야에서 정부에서 지원 받을 것들이 갑자기 무산됐다는 주변 에술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 문재인 의원과 박원순 시장, 안희정 지사를 그린 이하 작가의 그림을 걸치고 있는 문화예술인. 문 의원과 박 시장 지지선언을 했다는 문화예술인이 블랙리스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블랙리스트 진상규명 기자회견 및 예술행동에서 참가자들이 항의의 의미로 풍자 그림을 들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음악활동을 하는 손병휘 씨는 “이번 블랙리스트 3관왕에 빛나는 7집 가수”라고 본인을 소개하면서 “70년대에는 물리적 탄압을 했는데 지금은 은근 슬쩍 밥줄을 공격하는 방법을 쓴다. 나도 2년 전에 행사 초청을 받았다가 위에서 연락이 왔다며 잘린 적이 있다. 수준이 너무 저열하고 치졸하고 유치하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노순택 사진가도 연대 발언을 통해 “집에 특별한 책이 있는데 1990년 윤석양 이병이 폭로했던 국군보안사령부의 민간인 사찰 명단이 실린 월간 말지의 특별 부록”이라며 “그 중 많은 분들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은 분들이다. 그 분들처럼 헌신한 일도 없는데 블랙리스트라는 어마어마한 명단에 (내가) 끼었다. 반성하면서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 및 예술행동을 준비한 문화연대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들어 문화예술인에 대한 블랙리스트 의혹과 예술 검열 사례는 적지 않다. 임옥상 화가의 그림인 ‘하나됨을 위하여’라는 작품은 지난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전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해당 작품이 외압으로 빠졌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박근형 연출의 ‘소월산천’이라는 음악극이 연출가 배제를 요구하는 국립국악원과의 마찰을 빚다 공연이 취소됐다는 의혹도 나왔다.

이동연 문화연대 집행위원장은 “이번 정부의 검열 유형은 세 가지다. 사회적 사건과 재난을 다루는 문화적 표현물에 대한 검열, 야당 정치인과 인사 관련 시국선언을 한 문화예술인에 대한 검열, 그리고 박근혜정부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풍자 등 일체의 모든 예술행위에 대한 검열”이라며 “특히 세 번째 유형이 박근혜 대통령의 전제군주적인 정권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검열 사례라고 보여진다”고 말했다.

▲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문화예술인 100여명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규명과 검열 반대 등을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과 박재동 화백 등도 자리에 함께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임옥상 화백(왼쪽)과 민족춤협회 장순향 교수와 예술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팔짱을 끼고 도는 춤을 추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이날 세종시 문화체육관광부 앞과 전라남도 나주시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앞에서도 각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동시에 기자회견과 예술행동을 이어갔다. 문화예술인들은 이후에도 블랙리스트 예술가를 위한 시상식인 ‘블랙어워드’와 문화행정 파행 사례를 공론화하는 토론회 등 여러 행사와 집회 등을 이어가며 블랙리스트 논란에 강력히 반발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한편 이와 같은 블랙리스트 논란에 대해 지난 13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체부 종합국감 당시 조윤선 문체부 장관은 “세월호 시국선언에 동참했던 예술인에 대한 지원실적이 간략하게만 봐도 수십건이 넘는다”며 시국선언 참가자를 지원대상에서 일괄적으로 배제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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