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정신장애인)은 가둬도 되는가? 지역에 따라 1990년대까지도 동네에 돌아다니는 광인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과거 광인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었다. 좀 다르지만 그냥 옆에 있는 존재였다. 1995년 정신보건법이 제정돼 보호의무자(보통 가족, 당시엔 1명 현재는 2명)·정신과 전문의·행정기관(지자체장, 최근에 경찰 추가) 등을 통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한 강제입원이 보편화됐다. 해당 법 제정 20년이 지나자 광인을 정신병원에 가두고 치료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은 마치 시공간을 초월해 원래 그랬던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거슬러 올라가면 ‘광인을 잡아가둬야 한다’는 생각은 당연하지 않다. 유럽 정신의학의 세례를 받은 일제에 의해 한반도에 수입됐다. 16세기 르네상스 시기까지 유럽사회는 광인에 대해 방임하거나 찬양하기도 했다. 광인을 신과 인간 중간에 있는 존재로 봤다. 혹 문제가 생기면 마을에서 추방시켰다. ‘여행자’ 정도의 이미지였다. 감금이나 치료는 없었다.

17세기 중반(1657년) ‘대감금’의 시대가 왔다. 이때부터 '비정상'인을 잡아가두기 시작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시기에 광인은 성실한 임금노동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준범죄인으로 낙인찍혔다. 감금의 두 번째 이유는 당시 죄인에 대한 처벌방식이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행해진 잔인한 신체형은 강한 반발심 탓에 종종 반란으로 이어지거나 형벌집행자에게 과한 부담을 줘 지배의 효율성이 떨어졌다. 부르주아 사회는 죄인을 처벌하는 것보다 감시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판단을 했고, 감시시설이 늘어났다. 이때 광인도 감금의 대상이 됐다.

▲ 사진=pixabay

18세기 말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정신병원이 생겼다. 정신의학이 발명됐고, 광인은 감금의 대상인 동시에 치료의 대상이 됐다. 우리가 광인에 대해 ‘비정상’이지만 치료를 통해 ‘정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노동시장에 편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200여년 전 ‘발명’된 생각일 뿐이다. 이때부터 정상과 비정상을 판단하는 지식인 심리학·정신의학·정신병리학이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됐다. 치료의 대상이 됐지만 치료과정은 고문과 비슷했다. 예를 들면 우울증이 몸 속 점액질을 발현시킨다는 이유로 온 종일 따뜻한 물에 넣어놓거나 우울증으로 게을러지는 것을 막겠다며 밀폐된 방에 가두고 물을 흘려보내 계속 물을 퍼내게 하는 식이었다. 지금 보면 황당한 일들이다.

광인 진단은 객관적인가

“별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아이작 뉴턴)

‘광인을 가둬야 한다’는 생각이 발명됐듯이 광인을 판단하는 기준도 발명됐다. 한국 정신의학계에서 성서와 같은 지위를 점하고 있는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정신장애 진단통계 편람)은 광인과 정상인을 나누는 (객관적이라고 알려진) 기준이다. DSM은 미국정신의학회(APA)에서 출판한 진단기준이다. DSM-Ⅵ 작성팀을 이끌고 듀크 대학에서 정신의학 학부장으로 일했던 앨런 프랜시스는 DSM의 객관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양심선언이다.

그는 DSM이 “부당한 경배의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DSM이 개발되면서 누가 건강한 사람이고 누가 아픈 사람인지, 어떤 치료를 제안할지, 누가 비용을 댈지, 누가 장애 수당을 받을지, 누가 정신 건강이나 교육이나 직업이나 여타 분야의 복지 서비스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누가 일자리를 얻고, 아이를 입양하고, 비행기를 몰고, 생명 보험에 들 수 있는지, 살인자를 범죄자로 볼지 정신병 환자로 볼지 등이 결정됐다. DSM을 둘러싸고 많은 이권이 개입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앨런 프랜시스에 따르면 DSM은 스스로도 신뢰할 수 없는 기준이었지만 그의 많은 동료들(정신의학자)은 허점을 외면한 채 DSM 개정 작업에 참여하는 것에만 들떠 있었다.

편향을 줄이고 최대한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하지만 정신의학자들이 모여 DSM을 만드는 이상 그들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실제 진단기준을 몇 가지 보자. 반사회성 인격장애 진단기준(1994)에는 “충동적 또는 미리 계획을 세우지 못함”과 같은 항목이 있다. 성실하게 계획을 세워서 행동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인지,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지만 개인성향상 계획을 세우지 않는 사람은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법에서 정한 사회적 규범을 지키지 못하고, 구속당할 행동을 반복하는 양상”에 대한 항목은 범죄자를 가려내는 항목에 가깝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모두 ‘비전문가’라는 이유로 무시된다.

다른 맥락의 지적이지만 DSM은 젠더 편향적이기도 하다. 실제로 DSM-I과 DSM-II의 개발을 주도한 위원회는 모두 남성들로만 구성됐다. 여성 정신과의사와 심리학자가 포함된 DSM-III도 19명의 태스크포스 구성원 중 4명, 인격장애 부문 10명 중 1명만이 여성이었다.

젠더 편향은 실제 통계로 나타난다. 2011년 보건복지부에서 실시한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 결과 니코틴, 알코올 사용장애를 제외한 모든 정신장애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높은 유병률을 보였다. 생물학적 요인도 물론 고려해야 하지만 국내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에서 정신질환 관련기관을 방문하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2배 정도 많다는 사실을 모두 해명하긴 어렵다. ‘젠더’라는 요소만 살펴봐도 DSM이 객관적이라고 보긴 어렵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범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쟁하는 가운데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공기처럼 일상에 침투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감금방식의 진화

1975년 내무부 훈령 410조는 부랑인을 교화한다는 명목으로 경찰과 공무원들에게 부랑인을 잡아가둘 수 있는 권한을 줬고, 그 결과 1987년까지 부산 형제복지원에는 밝혀진 것만 551명이 사망했고, 폭행·성폭행·강제노역·임금미지급 등 인권침해가 발생했다. 형제복지원 관련 사안을 다루다보면 “인권침해는 나쁘지만 부랑인을 잡아가두는 것은 필요했다”는 반론을 마주하게 된다.

▲ 국가기록원 기록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매년 20여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는 한편 원생들을 무상으로 노역시키고 부실한 식사를 제공해 막대한 금액을 착복했다. 사진=형제복지원사건진실규명을 위한대책위원회 제공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이혜율씨는 동생과 대전에 있는 외가집에 가다가 잠들어 부산까지 가게 됐고, 시간이 늦어 어른들에 의해 파출소에 맡겨졌다가 형제복지원에 1983년(당시 7살)부터 1987년까지 감금됐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임영택씨는 이사하는 날 어른들이 이사짐을 정리하면서 애들은 나가서 놀라고 해 놀다가 낯설어 보여 파출소에서 데려갔다가 형제복지원에 1981년(당시 12살)부터 1987년까지 감금됐다.

이들을 부랑인이라 단정할 수 있나? 사회복지학계와 정부는 여전히 ‘부랑인’의 정의조차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있다. 부랑인은 권력자에 의해 정해질 뿐이다. 지식전문가와 공권력이 전문성을 잃은 상황에서 정신장애인은 부랑인을 대체한다.

정부·여당은 26일 조현병 환자에 대해 전수조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홍석철(조현병)씨는 “성범죄자처럼 발찌를 채우지는 않을까, 또 어떤 일을 벌일까 두렵다”며 “노숙인 중에 정신장애인이 많은데 노숙인들이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에서 언급했던, 유럽에서 17세기 중반 ‘대감금’의 시기 때 권력이 잡아 가둔 사람은 광인 뿐 아니라 부랑인, 신체장애인 등도 있었다. 이제 경찰은 부랑인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눈엣가시들을 잡아가둘 필요가 없다.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등 전문가에게 정당성을 얻어 치안을 유지할 수 있다. 언론도 경찰은 비판할지언정 전문가들을 비판하진 않는다. 감금시설이 있는 이유는 사회 전체가 자유롭지 않다는 걸 숨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상’임을 계속 입증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참고문헌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앨런 프랜시스,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이소연, ‘정신장애 진단에서의 젠더 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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