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파정치를 청산하겠다며 도입한 더불어민주당 혁신안이 채 10개월도 되지 않아 휴지조각이 될 처지에 놓였다. 더민주 전당대회 준비위원회가 최고위원제 및 사무총장제 폐지를 골자로 한 혁신안을 폐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더민주 전당대회준비위(전준위)는 30일 1차 회의를 열고 지도체제 개편에 대해 논의한다. 핵심은 문재인 당대표 시절 마련된 혁신안의 지도체제를 다시 예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전준위는 1차 회의 이전인 27일 비공개 회의를 열고 최고위원제 유지, 사무총장제 부활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새정치민주연합 당권재민혁신위원회(혁신위)는 지난해 7월8일 2차 혁신안을 발표했다. 최고위원제를 폐지하고 지도부를 지역, 세대, 계층 등 부문의 대표로 구성하고, 새로운 지도부의 구성 시점은 총선 직후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무총장 제도를 총무본부장, 조직본부장, 전략홍보본부장, 디지털본부장, 민생생활본부장의 5본부장 체제로 개편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 지난해 9월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안 실천 촉구 결의대회에 참석한 이해식 상임공동대표가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이유는 계파 청산이다. 최고위원이 되기 위해 지역구도 아닌 곳에서 선거운동을 하다보면 계파에 기댈 수밖에 없고 최고위원회의 자체가 계파갈등의 장이 되다보니 최고위원의 대표성을 직능, 세대, 지역 등으로 바꾸자는 것. 또한 당내 권력이 사무총장에 집중돼 사무총장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가 계파갈등의 원인이 되므로 이를 5본부장 체제로 전환하자는 것이 혁신안의 취지다.

관련기사 : 사무총장 없애는 게 혁신? 산으로 가는 새정치

이러한 내용의 혁신안은 지난해 9월16일 중앙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혁신안을 두고 계파 갈등이 심해지자 문재인 전 대표는 대표직까지 걸었고, 혁신안은 반대 의원 몇몇이 퇴장한 채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전준위는 이렇게 통과된 혁신안을 다시 되돌리려 하고 있다. 권한을 지나치게 분산시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이유다. 대선을 앞두고 당 대표에게 권한을 몰아줘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 직능에 세대별 대표까지 10여명으로 구성된 대표위원회 제도는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사무총장 권한을 5개본부장에 분할시켜놓은 시스템도 비효율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장선 전준위 총괄본부장은 26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지역별 대표와 직능대표 10명으로 구성된 지도부를 구성하게 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이 과연 적합하느냐는 당내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이번에 이런 부분들을 옛날 최고위원제로 변화시켜야 한다거나 전국 당원들이 선출하는 최고위원제를 부활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들이 있다”고 말했다.

혁신위원을 지낸 인사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나오고 있다. 임미애 전 혁신위원은 30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이 혁신안은 혁신위에서만 통과된 안이 아니라 중앙위라는 정식 절차를 거쳐 통과된 안이다. 당내 최고의결기구의 결정사항에 대해 너무나 쉽게 번복하려고 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며 “지금은 어떻게 하면 중앙위를 통과한 혁신안을 정착시켜나갈 것인가 구체적으로 논의해야하는 단계인데 지도부가 바뀌었다고 중앙위를 무시해버리면 당의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라고 말했다.

임 전 위원은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대해 “민주주의는 효율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지도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이유는 이 당이 그 전의 당과는 달라야한다는 생각 때문”이라며 “시행해보지도 않고 중앙위 결의사항을 그렇게 일거에 무시해버리는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애초에 혁신위는 계파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난해 문재인 대표 체제가 들어선 이후 당내 권력을 ‘친노 주류’가 장악하고 있다는 비주류의 문제제기가 늘어나면서 당의 계파갈등이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문재인 대표과 주류는 혁신위와 혁신안을 통해 공천권 등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후 김종인 대표 체제가 들어서고 더민주가 총선에서 원내 제1당을 차지하면서 계파갈등은 상당 부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계파갈등을 막자며 혁신안을 추진했다가 막상 계파갈등이 보이지 않자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혁신안을 백지화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 김종인(오른쪽)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가 3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전당대회준비위원회 1차 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 하고 있다. 왼쪽은 오제세 전준위원장. ⓒ포커스뉴스
전준위에 문재인 전 대표와 가까운 인사가 없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오제세 준비위원장을 포함해 정장선 총괄본부장, 이찬열‧유은혜‧윤관석‧이철희 의원 등 대부분의 전준위원들은 ‘친문’으로 분류되지 않는 인사들이다. 비주류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계파갈등을 이야기할 필요성이 적어졌다는 것.

혁신위원을 지낸 우원식 더민주 의원은 30일 ‘MBC 신동호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권력이 집중되면 계파가 나오는 건 언제든지 마찬가지다. 시스템으로 체제로 바꾸지 않으면 언제든지 계파갈등은 양산될 수 있는 것”이라며 “(혁신안을) 폐기하는 건 다시 그런 계파갈등으로 갈 수 있는 계파의 시대로 돌아가자,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임미애 전 혁신위원도 “단순히 계파갈등 때문에 최고위를 없애자고 한 건 아니다. “계파만 보면 당이 조용해졌으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다”며 “이제 국민들은 생활 곳곳 뿌리내린 정치를 원한다. 그래서 직능별, 세대별, 지역별  대표들을 구성하고 이 대표위원들을 중심으로 해서 현안들을 논의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혁신안”이라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