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를 두고 교통사고래요. 그런 다음에 조용히 하래요. 교통사고야, 그러니까 조용히 해? 한국에서는 교통사고 나면 조용히 하나요? 그런데 그 말을 언론이 해요. 저한테는 ‘세월호는 모두의 아픔이에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세모바퀴가 달린 자동차가 굴러가는 느낌이에요.”

김동빈 감독은 세월호를 기록하기 위해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김 감독은 2014년 7월부터 8월까지 유가족들과 함께 국회 농성장에서 생활했다. 시선을 끌고 감정선을 자극할만한 영상도 많이 찍었다. 그런데 김 감독과 ‘프로젝트 투게더’ 팀이 만든 다큐멘터리 ‘업사이드 다운’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오히려 슬퍼질만하면 가차없이 자르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버린다. 다큐는 1시간 내내 단원고 희생자 아버지 4명과 16인의 언론·해양·법률·교육·노동 등 각계각층의 전문가 인터뷰로 담담하게 구성돼있다. 김 감독은 “울고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김 감독이 특히 주목한 건 언론이다. 그가 한국으로 오게 된 계기 중 하나가 세월호를 보도하는 한국 언론의 태도라고 했다. 김 감독은 방송통신을 전공하고 미군 전사자 유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버몬트 폴른(Vermont Fallen)' 을 제작해 2013년 북미전문저널리즘학회 심층취재 부문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아래는 김 감독과의 1문 1답이다. 

▲ 김동빈 감독. 사진=시네마달 제공
-세월호 침몰 사고를 어떻게 알게 됐나?
“미국시간으로 15일 밤, 16일 새벽에 미국 뉴스 속보를 보고 알게 됐다. 전원 구조라고 했다. 그리고 잠에 들었다가 아침에 오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재난시 오보는 없을 수 없다. 보스턴 마라톤 때도 그렇고 카트리나 때도 오보는 있었다. 충격을 받았던 건 오보를 대하는 한국 언론의 태도였다. 너무도 태연하게 ‘이거였는데 아니래, 다 구했는줄 알았는데 못 구했대’ 라는 식이었다.”

-어떤 면에서 태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나?
“미국 언론은 오보를 수정해도 항상 근거를 댄다. 어느 병원에 따르면 이랬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이랬다더라 식이다. 한국 언론은 그런 설명 없이 숫자가 수차례 바뀌었다. 충분한 설명이나 근거가 있는 상황에서 바뀌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이거 그냥 받아쓰는 건가?”

-혹시 당시에 특히 기억에 남는 보도가 있나?
“세월호 참사 다음날인가 한 방송사에서 보험금 이야기를 했다. 저는 물론 세월호에 충분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구조할 때는 구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시청자가 그 보도를 보게 되면 ‘이 사람들 돈 되게 많이 받네’ 라고 생각하게 된다. 참사에 대한 관심이 돈으로 가버리는 거다.”

당시 MBC는 사고 당일인 16일 <특집 이브닝뉴스> 리포트 ‘“2달전 안전검사 이상 없었다”…추후 보상 계획은?’에서 “먼저 인명피해가 났을 경우 한 사람당 최고 3억 5천만 원, 총 1억 달러 한도로 배상할 수 있도록 한국해운조합의 해운공제회에 가입된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현재 해당 보도는 온라인에서 삭제된 상태다.

-침몰 사고 며칠 뒤에 다큐멘터리를 만들자는 글을 온라인에 올렸다고 들었다.
“기록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인이 아닌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보면 의미가 크겠다고 생각했다. 4월20일부터 23일까지 80여분이 연락을 주셨다. 가장 먼저 연락을 준 사람은 제가 살던 동네(보스턴)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호주나 이탈리아, 한국의 고등학생 등도 연락을 주었다. 화상 채팅 등을 통해 회의했고 최종적으로 25명의 팀원이 끝까지 함께하게 됐다.”

▲ 다큐멘터리 업사이드다운 스틸컷
-25명이나 되는 비전문 제작인력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나? 굳이 이렇게 한 이유가 궁금하다. 
“촬영보조팀, 취재팀 등으로 나눴다. 가령 취재팀은 언론인이 되고 싶은 대학생 친구가 인터뷰이를 찾고 사전 취재를 했다. 촬영보조팀은 장비를 세팅해줬다. 어떤 분은 차를 빌려주시고 정작 자기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덕분에 편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됐지만 현물이든, 시간이든, 노동력이든 이 영화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1000여명의 시민이 펀딩에도 함께 했다. 제작부터 상영까지 시민들과 함께 만든 영화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건 그해 7월이라고 들었다. 언론으로만 접하던 것과 실제 세월호를 취재해보니 어땠나?
“오기 전에는 ‘에이 이 정도일까’ 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와서는 내가 너무 약하게 봤다고 생각했다. 안전을 무시하고 살고 있고, 안전사회를 요구하는 유가족은 떼쓰는 사람들로 보도된다. 사람들은 네가 슬픈 건 알겠는데 피로하니까 좀 닥칠래? 라고 한다.
가령 안전과 관련해서, 작년에 소방관이 제 방문을 두드려서 앞방에 불이 났으니 나오라고 했다. 소방관이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 앞집에 사는 저도 몰랐다. 화재경보 시스템이 엉망인거다. 다음날 오피스텔 출입문에 ‘불조심 합시다’라는 글이 붙어져있었다. 충격 받았다. 그 오피스텔만 그랬을까?“

-국회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낼 때는 어땠나?
“처음부터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국회에 머물면서 가족들과 최대한 교감을 하려고 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조 버간티노 뉴잉글랜드 탐사보도센터장에게 조언을 받았다.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면 무조건 그들의 편이 돼서 그들의 입장을 먼저 보라고 했다. 사회적인 배경을 공부하고 비교하는 건 그 이후다. 언론인으로 간다면 교감 없는 정보는 무의미하다.”

▲ 김동빈 감독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도보행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시네마달 제공
-한국 기자들도 세월호 가족들의 아픔을 담아낸 기사를 많이 썼다. 교감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가족들을 슬프게 그린다고 해서 교감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의 슬픔을 팔아먹는 건 교감이 아니다. 대변하는 게 교감이다. 기자가 이미 기사의 틀을 정해놓고, 유가족의 말을 빌려서 끼워넣는 건 교감이 아니다. 가족들이 가장 슬펐던 것도 이런 지점이다. 언론들이 자기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것.”

-김 감독이 보기에도 그랬나? 가족들과 지내면서 만난 한국 언론은 어땠나?
“개인적으로는 좋은 기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보도는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나쁜 기자들도 있었다. 가족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와서 찍는 기자들이다. 그리고는 자기네 입맛에 맞는 방송화면으로 내보낸다. 어떤 언론들은 인턴 기자를 내세워 사진을 찍게 한 다음 항의가 들어가면 인턴에게 몰아버린다. 취재하는 인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업사이드 다운’에는 감정적인 장면이 없는 건가?
“영화가 울면 관객이 운다. 영화가 슬프니까. 세월호 같은 대형 참사는 울고 감정해소하고 끝날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관객들에게 세월호 슬프지? ‘너도 울어’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이렇게 아프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 다음 문장은 관객들이 채워 넣으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 관객들이 안 좋아할 것 같다. 소위 안 팔리지 않나?
“동물의 뇌는 꾸준히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원한다. 우리도 더 재미있고 흥미있고 감정선을 타는 영화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하려면 아버지들 이야기만 따서 만들면 된다. 영화를 보면 아버지들이 별로 안 힘들어하는 것 같지만 실제 인터뷰에서는 십분 마다 인터뷰를 끊어야 할 정도로 우셨다. 하지만 그렇게만 하면 발전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냥 뇌의 자극만을 따라서 사는 존재들인가? 언론도 마찬가진 거 같다. 이제는 왜 이래야 하는지 돌아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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