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대표 공천을 둘러싼 더불어민주당 내부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겉으로 보기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사퇴카드를 흔들면서 ‘비례2번’을 요구하고 나머지 비대위원들과 당 지도부가 만류하는 상황이지만, 속사정은 더 복잡하다.

김종인 대표는 22일 오후 이틀간의 칩거를 깨고 당무에 복귀하면서 ‘당무 복귀’를 공식 선언하지 않았다. 게다가 ‘셀프 지명’ 논란을 부른 본인의 비례대표 순번에 대한 결정권을 비대위에 일임했다. 김 대표는 비대위 회의에서 ‘(비례) 2번을 비우고 논의하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퇴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김 대표가 비례대표 2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퇴까지 꺼내며 비대위를 흔드는 모양새다. 문재인 전 대표가 직접 나서서 설득했으나 김 대표는 비례대표 2번 지명이 노욕으로 비춰지는 점에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김 대표가 대표 사퇴까지 꺼내들면서 비례대표 2번을 고집한다는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가 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비공개 회의를 마친 뒤 퇴장하고 있다. ⓒ포커스뉴스



김 대표는 왜 ‘노욕’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더민주를 흔들고 있는 걸까. 김 대표의 칼이 비대위원들을 향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 대표는 21일 광화문 개인사무실에서 가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비대위원들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김 대표는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내가 그 전에 경고를 했어요. 이걸 갖고 중앙위에 순위해달라고 가면 난장판 벌어질 거다 그랬는데, 그 사람들이 괜찮다고 하더라고”라며 “그런데 그 상황이 그대로 벌어진 거야. 그러면 당신네들이 그럼 알아서 하라고 이야기를 한 거야”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런 일’이란 비대위가 만든 비례대표 명단, 그리고 ABC 그룹을 나눠 투표하게 한 방식이 20일 중앙위에서 보이콧 당한 일을 뜻한다.

김 대표는 또한 “나는 내가 임명한 사람들이지만 우리 비대위원들 행동에 대해서 백프로 신뢰하는게 아니야. 억지로 지금까지 끌고 온 건데”라며 “내가 솔직히 이야기해서 (비례대표에)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라고 말한다.

비례대표 순번 1위를 받은 박경미 홍익대 수학과 교수 등은 김 대표가 지명했다. 당헌에도 당대표 권한으로 비례대표 3명을 전략 공천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중앙위가 강하게 반발했던 대목은 A, B, C 그룹으로 나눠서 표결하는 대목이다. 김 대표가 기자들에게 한 말과 종합해보면 ‘셀프 지명’ 외에 중앙위 파행을 이끈 그룹별 투표방식 등은 김 대표가 아닌 비대위원들이 주도했고, 김 대표가 비대위원들에게 ‘난장판’을 경고했던 이유다.

일부 비대위원들은 왜 그룹별 투표방식을 고집했을까. 김성수 더민주 대변인은 21일 오후 기자간담회에서 “(투표에서) 칸막이를 쳤던 이유는 중앙정치권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아니기 때문에, 중앙위원들이 이분들을 짧은 시간에 파악하기에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제일 걱정하는 부분은 28명 놓고 투표하는데, 대부분 중앙위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분들을 단순히 중앙위 순위투표로 순번을 정해서, 국회의원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또한 “당 대표나 지도부에서 이 사람 정도는 반드시 우리 당이 비례대표로 내세워야겠다는 분 있을 것인데 규정에 따르면 쉽지 않다”며 “당연히 내세우고 싶은 분 있을 것인데 그런 분들이 배제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럴 확률을 줄이기 위해 칸막이를 쳤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석하자면 비대위원들이 내세우고 싶은 비례대표 후보들이 있었고, 완전 공개형 투표를 하면 배제될 인지도가 낮은 인물들이라 그룹별 투표방식까지 도입했다는 뜻이다. 실제 그룹별 투표를 배제하고 투표한 결과 A그룹에 포함돼 있지 않던 김현권, 이철희, 이수혁, 이재정 후보 등이 상위권으로 올라왔고 원래 A그룹에 있던 김숙희, 양승숙, 조희금 후보 등은 하위권으로 밀려났다.

물론 ‘셀프 지명’과 논문 표절 논란에 휩싸인 박경미 교수를 1번에 공천하기로 한 것은 김종인 대표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중앙위가 비대위 결정을 보이콧하는 파행으로까지 이어진 데는 이 선택 외에 김 대표가 통제하지 못한 비례대표 명단, 그리고 당헌당규 위반 논란까지 불러일으킨 그룹별 투표방식이 크게 작용했다.

그럼에도 이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오로지 김종인 대표의 ‘노욕’과 ‘고집’으로 표현됐다. 김 대표가 필리버스터 정국 등에서 지지층의 여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 대표가 분노한 이유를 단순히 셀프지명으로 인해 욕을 먹게 된 상황에 대한 분노라고 보기는 어렵다. 김 대표는 21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비례 2번 하는 것하고 12번 하는 것하고 뭐가 다르냐. 난 끝 번호에 넣어 동정을 구하는 정치는 안 한다”며 비례2번에 배정에 대해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김 대표의 분노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한 비대위로 인해 자신이 비대위원들이 결정한 내용에 대한 책임까지 떠 앉게 된 상황에 대한 분노로 보인다.실제 김 대표는 22일 비대위 회의에서 비대위원들에게 ‘비례대표 과정에서 대단히 자존심이 상했고 모욕적으로 느껴졌다’는 말을 했고, 비대위원들에게 서운했던 점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성수 대변인에 따르면 이날 비대위원 전원, 표창원, 김병관, 박영선, 우윤근 위원과 이종걸 원내대표 등이 김 대표에게 “중앙위 열리는 과정에서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고 준비작업이 소홀했던 부분에 대해 비대위원들로서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표창원 비대위원이 2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비례대표 후보자 추천 내용과 방식에 대한 논란과 문제는 전적으로 비대위의 책임”이라고 밝힌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김 대표는 잇따른 사과에도 ‘비례대표 2번을 빼두라’며 사퇴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단순히 비례2번을 달라는 요구라면 이해가 가지 않는 과한 행동이다. 김 대표가 ‘사퇴 카드’를 내세우는데 비례2번 지명 외에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김 대표가 사퇴 카드를 굽히지 않자 표창원, 김병관, 박영선, 우윤근 위원 등 비대위원은 22일 저녁 김 대표를 찾아 사퇴 의사를 밝힌다. 결국 김 대표가 판단하기에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한 비대위원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기강 다잡기’ 차원이었던 셈이다.

더민주의 한 관계자는 “김 대표가 공천 명단 과정에서 누구를 좀 넣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당에 선택받을 사람들을 어떻게 우선순번을 넣느냐는 부분들은 실무자들이 결정하는 거다. 그걸 대표가 다 준비했겠나”라며 “그런데 그룹별 투표의 의도가 중앙위에서 전혀 설명되지 못했고 이것이 김 대표 개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김 대표가 참기 어려워진 것 같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사전에 이야기를 못했다면 누구라도 나서서 ABC 그룹을 나눈 이유를 이야기라도 하고 비대위원들이 같이 책임을 통감해줘야 하는데 사태가 장기화될 때까지 누구 하나 나서서 책임을 통감해주지 않으니 분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김종인 대표가 이 상황을 당에 대한 전반적인 장악력을 높일 기회로 삼으려 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공천 문제로 내부갈등을 겪고 이것이 총선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민주당의 일종의 고질병을 고치려 한다는 뜻이다. 김 대표는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중앙위에 친노패권이 있나’라는 질문에 “패권을 행사하려면 똑똑히 하라고 해. 그따구 식으로 하지말고”라고 말했다. 당 운영에 대한 가치관을 드러낸 대목이다.

하지만 김 대표가 사퇴 카드까지 꺼내들면서 당내 김 대표에 대한 불만이 표면화될 가능성이 높다. 총선 이후, 총선 결과에 따라 김 대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그 때도 또 다시 김 대표는 사퇴 카드를 꺼내며 배수진을 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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