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대선개입으로 존망의 위기에 몰렸던 국가정보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른바 ‘NLL 정상회의록’을 전면 공개하면서 대한민국 사회에 파문을 던지고 있다. 정치분석가들 뿐 아니라 북한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국정원의 이런 행위를 두고 ‘정치개입 비난을 또다른 정치개입으로 돌파’하기 위한 정치공작이라는 혹평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 역시 이 같은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묵인하거나 방조했다는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국정원 ‘칼’들고 정치개입, 민주주의 근간 또 흔들어”=국정원이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에게 공개한 것에 대해 이강윤 정치평론가는 25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국정원이 시퍼런 칼을 들고 국내정치에 개입한 것”이라며 “국정원의 ‘국내정치 불개입’ 원칙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평가했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국정원의 난’이라는 비유도 썼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국정원이 현실정치에 스스로 개입했다는 것을 자인한 것”이라고,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역시 “정파적 입장에서 지난 대선에 개입한 국정원이 도다시 정치권 한복판에 개입해 민주주의 근간을 흔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혹평했다.

이철희 두문정치연구소장은 “매우 잘못된 행위로, 원본과 사본 모두 대통령기록물인 정상회의록을 국정원장이 임의로 등급을 변경해 일방 공개한 것은 앞뒤도 안맞고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심시어 박성준 SBS 앵커조차 24일 저녁 생방송 <8뉴스>에서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가 국정원장의 고심어린 결단이라는 말이 여당에서 나왔다”며 “정치행위였다는 해석을 낳을 수 있는 말…그렇다면 국정원은 의도가 뭔지, 혼자 결정한 건 맞는지 앞으로 논란과 파장도 감당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미디어오늘이 25일 청와대·외교부·통일부·국방부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이같은 결과가 나왔다. 현직기자들 10명 중 8명이 국정원의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회의록에 NLL 포기 발언?=공개된 정상회의록(발췌본 또는 전문)을 본 상당수 대북전문가 및 정치평론가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거나 포기한 것으로 짐작할 발언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이철희 소장은 “새누리당 공세가 과장, 왜곡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라고, 양무진 교수는 “되레 야당에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노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모두 신중하게 한반도평화를 위해 협상했음을 보여준 회의록”이라고 평가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도 “NLL 포기가 아니라 남북 상생을 위한 접점을 찾고 전쟁위험을 최소화하려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고 해석했다.

이에 반해 이강윤 정치평론가는 “노무현 특유의 화법이 나오는데 새누리당은 이것을 포기한 것으로 해석하고, 민주당은 평화 구축방안을 모색한 것으로 해석한다”며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므로 정답이 없기 때문에 공개한 것 자체가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결정”이라고 평했다.

▷“국정원, 국조 안 받겠다는 발악…국면전환 자신감”=국정원이 이 같은 파장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개한 배경을 두고도 여러 분석이 나온다. 이강윤 평론가는 “국정원이 국정조사를 받을 위기에 몰리자, 그것 만은 못하겠다는 발악을 한 것 아니겠느냐”며 “국익을 훼손시키더라도 지들의 위기를 모면해 보려는 것으로 밖에는 해석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양무진 교수는 “국정원법상 정치중립에 반하는 행위로, 새누리당이 제기하고 국정원이 편승하는 방식으로 댓글사건을 희석하려는 의도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유창선 박사는 “역풍이 불더라도 불리할 것 없으며, 국면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라며 “NLL 정국 조성→국정조사 수용을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되찾는다는 구상으로, 야권의 대응에 비해 한수 위”라고 분석했다.

   
 
 
▷‘무조건 몰랐다’는 박대통령, 그 말 누가 믿을까=청와대와 박 대통령은 전혀 몰랐다는 입장이다.
국정원 대변인은 25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회의록 공개는 보고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보고후 승인받을 사안도 아니며, 국정원장이 전권을 갖고 할 수 있도록 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철희 두문정치연구소장은 “대통령 보고 않고 공개 결정을 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정상의 회의록을 공개하는데 현재의 정상이 모른다는 것은 누가봐도 어색한 말”이라고 지적했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위원은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의 행위가 박 대통령 모르게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이번사태는 결국 박 대통령의 정치력과 판단력의 문제를 드러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현직 기자들도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결정했거나 국정원과 협의해 결정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5일 미디어오늘의 설문조사 결과, 더 많은 수의 기자들은 ‘남재준 국정원장’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를 결정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비난화살 피하겠으나 장기적으로 부메랑될 것”=이 사건이 결국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난국면의 전환을 꾀할 수 있으나 부메랑이 될 것으로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철희 소장은 “국민들이 원본을 얼마나 들여다보고 판단할지는 미지수”라며 “공개한 것도 잘못, 노 전 대통령 발언도 잘못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지 않을까 본다”고 내다봤다.

그에 반해 이강윤 평론가는 “일시적인 위기 모면이나 탈출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조금만 길게 보면 국정원이나 우리 정치권 모두에 큰 해악으로 나타날 것”이라며 “NLL대화록을 공개했다고 해서 국정원 댓글 사건이 묻히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유창선 정치평론가 역시 “집권세력의 이 같은 무리수는 반드시 탈이 나게 돼 있다”며 “공작냄새를 너무 풍겼다. 정치가 아닌 공작으로는 민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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