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비자금 사건을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는 1996년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 검사로 재직하던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를 맡은 바 있다. 검찰은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해 전 전 대통령 친인척 300명의 재산을 샅샅이 조사한 결과 전씨가 기업인들로부터 9500억여원의 비자금을 거둬들여 이 가운데 5774억원을 정치자금으로 썼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검찰은 2295억원을 뇌물로 인정했고 법원은 1997년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했다.

김용철 변호사는 10일 미디어오늘과 전화 통화에서 “전두환은 비자금을 주로 산업금융 무기명 채권으로 보관했던 것 같다”면서 “이자가 연 16.5%나 됐는데 문예진흥기금에 맡기거나 국가안전기획부 자금과 섞어서 관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정부 자금은 이자 소득세가 면제되기 때문일 텐데 국가 돈을 도둑질한 것도 모자라 세금까지 탈루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수사본부 사무실에는 수백억원 규모의 채권과 현금 다발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때는 도난과 정보 유출 우려 때문에 외부인은 물론이고 청소부 아줌마조차 출입금지였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10억원 이상 현금 입출금 내역을 추적하던 도중 전씨와 쌍용그룹 김석원 전 회장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게 몸통이다”하는 느낌이 왔다고 한다. 윗선에도 곧바로 보고를 했다. 그러자 위에서 수사 중단 지시가 내려왔다.

김 변호사는 지시를 무시하고 쌍용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쌍용양회 지하 창고에서 사과 상자 25개에 담긴 현금 61억원이 나왔다. 수사를 중단하라는 상부의 압력이 거세지자 김 변호사는 압수수색 과정에서 몰래 찍은 사진을 언론에 흘린다. 김 변호사는 “언론과 일정한 거리를 두던 내가 언론을 이용한 몇 안 되는 사례였다”고 기억한다. 이 사건은 김 변호사의 언론 플레이 덕분에 석달 뒤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경향신문 1996년 4월16일 31면.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이 돈은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직후인 1993년 11월 전씨가 맡긴 산업금융 채권을 쌍용이 현금화하고 전씨가 일부 찾아간 뒤 나머지를 보관하고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전씨가 골프장에서 우연히 김 회장을 만나 1억원짜리 채권 88장을 실명 전환해 현금화해달라고 부탁했다”고 밝혔다. 금융실명제법 위반이 명백했지만 검찰은 김 전 회장을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김 변호사는 “그렇게 찾아낸 전씨의 비자금이 1조원에서 450만원 모자라는 돈이었다”면서 “실제 비자금 규모는 공식적인 수사를 통해 밝힌 것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쌍용 사과 상자 사건 이후 재벌 회장들이 잇따라 불려왔고 적게는 수십억에서 많게는 수백억원의 정치자금을 건넨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축소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전두환 비자금 사건 수사에서 후회스러운 건 대통령 재정경제명령을 발동하지 못한 것과 전두환 부부의 침실을 압수수색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신고 되지 않은 모든 채권을 실권 조치하는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건의했지만 묵살됐다. 그래야 숨어있는 채권을 끌어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전씨는 길게는 20년 만기 채권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숨어있는 채권이 얼마나 더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두환 자택 압수수색은 비서관 사무실을 뒤지는 데 그쳤다. 이틀이나 걸렸지만 김 변호사에 표현에 따르면 “행랑채와 주차장 정도만 뒤지다 말았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라는 이유로 침실 등 전씨의 개인 공간은 들어가지도 못했다. 전씨가 한때 머물렀던 백담사를 압수수색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역시 묵살됐다. 김 변호사는 “전씨의 침실을 압수수색하지 못한 걸 두고두고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용철 변호사.
이치열 기자 truth710@
 
김 변호사는 전두환 비자금 사건 수사가 마무리된 직후 서울지검을 떠나 부천지청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부부장 진급이 예정돼 있었던 터라 명백한 문책성 인사로 받아들여졌다. 김 변호사는 그러나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옛날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라고만 말했다. 김 변호사는 2007년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계속 수사하겠다고 했다가 검찰 고위 관계자한테 ‘너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라는 얘기도 들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 변호사는 1997년 부천지청으로 내려간 뒤 몇 달 안 돼서 검찰을 떠나 삼성그룹으로 옮겨간다. 7년 가까이 삼성그룹에서 재무팀과 법무팀 등에서 일하면서 삼성에버랜드 사건의 기소를 막고, X파일 등 삼성을 상대로 한 여러 소송에 대한 조언을 하다가 2004년 삼성을 떠난다. 그리고 2007년 삼성 비자금 사건을 폭로한다. 김 변호사는 현재 광주광역시 교육청 개방형 감사담당관에 임명돼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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