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대선 여론 조작 및 정치 개입 의혹 사건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 검찰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 수사를 벌이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는 주요 포털 등 15개에 달한다. 또 검찰은 수백 개의 아이디가 여론 조작에 동원된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수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국정원이 광범위한 여론 조작 활동을 한 정황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최종 수사 결과 발표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사법처리 되지 않겠냐는 관측이 우세하다. ‘국정원을 흔들지 말라’는 목소리도 이젠 잠잠해졌다. 지난해 12월11일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29)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지 꼬박 5개월 사이의 변화다.

지난 1월 3일 수서경찰서는 기자간담회에서 “김씨가 쓴 게시글은 모두 여행, 음식 등 취미와 관련한 것”이라고 밝혔다. 국정원법이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18일, 경찰은 결국 김씨 등 3명이 작성한 게시글을 근거로 이들에게 국정원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애초 경찰이 밝혔던 내용과 정반대의 결과다.

국정원 사건에서는 유독 이 같은 일이 잦았다. 의혹의 중심에 있는 국정원은 애초 “김씨가 인터넷에 작성한 글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1월31일 <한겨레> 보도로 김씨가 작성한 게시글 91개가 드러나자 “종북 대응 차원에서 작성한 글”이라고 말을 바꿨다. 하지만 원 전 원장 등은 2월 국회 정보위에 참석해서 의원들에게 또다시 “글은 김씨가 개인적으로 쓴 글”이라고 밝혔다.

경찰이 사건을 매듭지은 최종 수사결과 발표 때도 이 같은 일은 반복됐다. 지금은 서울 지하철경찰대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광석 전 수서경찰서장은 지난달 18일 최종 수사결과 발표를 진행하다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이제 그만하자”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기자들이 “이대로 브리핑을 끝낼 수 없다”고 항의하자 임병숙 수서서 수사과장은 “개별적으로 모든 질문을 받아주겠다. 수십 명이 따로 와도 모두 응대할테니 브리핑을 끝내자”고 약속을 했다.

기자들은 그 약속을 믿었다. 하지만 임 과장은 △김씨 등이 인터넷에 올린 게시글의 수 △국정원 심리정보국장에게 소환을 통보한 날짜 등 기초적인 사실조차 확인해주길 거부했다. 수십여 명의 기자들 앞에서 “가르쳐 주기 싫다”, “숫자가 뭐가 중요하냐”는 말만 되풀이 했다. 30분간의 실랑이 끝에 수사팀은 “김씨 등 세명이 작성한 총 게시글은 400여개, 정치와 관련된 것은 100여개다”라고 발표했다. 정확한 개수를 밝혀달라고 하자 “정확한 개수까지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이날 브리핑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5개월 가까이 국정원 사건을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국가 비밀 사항이다”, “수사 중이라 밝힐 수 없다”였다. 국정원과 경찰의 말이 거짓이라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밝혀지면 “그때했던 말을 기자들이 오해한 것이다”는 해명이 돌아왔다. 비슷한 방식의 소모전이 계속됐다.

국가 비밀을 미주알고주알 캐묻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경찰이 미처 수사도 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답을 달라고 닦달할 생각 역시 없다. 하지만 지난 대선을 흔들었던 국정원 사건의 전말이 어떤지 국민들은 알 권리가 있다. 정확한 사실을 알아야 비판도 가능하고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을 기회도 열리기 때문이다.

특히 비밀로 둘러싸여 비판과 견제가 불가능하다시피 한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하고, 정권에 충성했다는 의혹이 있는 사건이라면 최대한 많은 사실을 공개해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경찰과 국정원이 숱한 말 바꾸기와 거짓말을 해온 것은 ‘발표하지 않은 사실을 없었던 사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 한겨레 정환봉 기자
 
5개월간의 취재과정에서 한 가지 보람이 있었다면 김씨의 게시글, 김씨를 도운 민간인 이아무개(42)씨의 존재, 원 전 원장의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과 출국 계획 등을 보도하며 ‘그들’의 자신감을 조금이라도 허문 것이다.

국정원 사건을 보면 ‘공작’은 확실히 ‘현대화’된 것처럼 보인다. 인터넷에 댓글을 달고, 특정 게시글에 조직적으로 추천·반대를 하며, 트위터를 이용할 정도니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인식은 여전히 구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들이 공작을 벌인 인터넷에선 비밀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구시대에 사는 이들에게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해 한번 생각해달라는 부탁은 너무 앞서 나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중에 들키면 부끄러우니 유의해서 사용해야 합니다”라고 적힌 ‘거짓말 사용설명서’는 하나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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