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이 폐쇄 위기를 맞은 가운데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남북을 둘러싼 기존 합의 존중 △지속적인 인도적·호혜적 교류사업 △남북 간 경제협력 다양화 및 북한 인프라 구축 사업 확대 등을 바탕으로 한 박 대통령의 대북 정책기조이자 공약이다.

그러나 정작 남북 합의를 통해 만들어진 경제협력의 상징 개성공단이 문을 닫으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도 사실상 실패한 것 아니냐는 진단이 나온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자체가 아니라 박 대통령 취임 이후 대북정책에 어떤 일관성이나 중장기적 목표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박 대통령의 정책은 비핵화 실현 뒤 개방을 하면 교류에 나서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과 유사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박 대통령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발표할 당시에는 야권 등에서도 기대감을 모았지만 정작 취임 후 한반도 프로세스는 실체가 모호한 정책이 됐다.

지난달 27일 통일부 업무보고에서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안보’와 ‘억지’에 방점을 뒀다. 통일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기반으로 대화·교류와 함께 ‘억지와 압박’도 포함했는데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 한반도 프로세스에 대한 설명과는 차이가 있다.

   
지난달 30일 오전 0시 30분경 개성공단에서 43명의 입주업체와 공사 관계자들이 차에 짐을 싣고 남북출입사무소로 귀환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박 대통령은 지난해 2월 ‘핵안보정상회의 기념 국제학술회의’ 기조연설을 통해 “천안함과 연평도 공격으로 불신이 깊어진 남북관계를 조속히 회복하고, 지속가능한 평화와 공동발전의 길로 접어들 수 있도록 저와 새누리당은 열린 자세로 북한의 변화를 위한 노력을 지원하고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통일부가 지난 25일 북한을 향해 “26일까지 답을 달라”며 불과 하루의 기한으로 남북 당국간 실무회담을 제안한 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대화제의가 아닌 북한의 잇따른 강경조치에 대한 대응적 성격이 더 짙어보였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소장은 “대화를 제의할 때 상대방에게 생각할 시간을 제공해야 하는데 내일까지 제의를 수용하지 않으면 ‘본보기를 보이겠다’는 식은 신뢰구축 방향과 어긋난다”며 “어떻게 보면 개성공단에서 남측인원들을 철수시키기 위한 명분 쌓기에 불과해 보이고 대화제의의 형식이나 진정성이 누락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의 대북기조가 실체가 모호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보다 이명박 정부 대북기조와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아예 대북정책기조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단 한 번도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가도 할 수 없다”며 “지금 남북관계는 북한이 어떤 행동을 하면 우리가 맞대응하는 방식으로, ‘박근혜표 대북정책’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임동원·이재정·정동영 전 통일부장관과 박지원 전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문재인 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등도 30일 조찬모임을 갖고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해 “이명박 정부와는 차별성을 보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으나 현 정부 대북정책 역시 지난 정부의 경직된 대북정책을 답습하고 있고, 대북정책에서의 혼란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우영 북한대학교대학원 교수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흘러가는 방향 자체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지향과 부합하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라며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신뢰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냉정하게 보면 지금 상황은 나쁜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우영 교수는 “남북관계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지만 개성공단과 관련된 정부의 입장을 보면 일관성 있는 목표로 가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여전히 이명박 시대와 같이 북한을 교육시키고 북한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에서 신뢰 프로세스가 (실현되기는)어렵다”고 말했다.

   
귀환한 개성공단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려는 취재진들이 기차가 달리지 않는 경의선을 따라 달린다. 귀환한 개성공단 관계자들은 대체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을 피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유효하다는 입장이다. 통일부 김형석 대변인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북한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주체이자 협력의 대상이라는 이중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며 “북의 도발에 억지력을 발휘했지만 북의 취약계층 지원은 한다는 의미로 결핵약 지원도 허가했고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화제의도 했다”고 말했다.

김 대변인은 “북한의 선택으로 남북관계가 아직 정상화의 길로 들어서지 않아 그런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신뢰프로세스는 지금도 가동 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긴 호흡을 가지고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비핵·개방 3000’과 유사하다는 지적에는 “이명박 정부 때는 북한이 먼저 입장의 변화를 보이라는 전제조건이 있었지만 우리는 대화의 장에 나오라는 것으로 차이가 있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회복하고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남북관계를 중장기적으로 보고 대화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용현 교수는 “신뢰 프로세스는 북한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면서 남북관계를 대화 분위기 속에서 바라보는 부분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전직 통일부 장관들도 “박근혜 정부는 진정성 없는 대화제의 보다 한반도 프로세스 내용을 조속히 공개하고 역대 정부들이 북한과 합의했던 사항들은 준수하고,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북한 비핵화와, 평화협정체결을 포괄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고위 당국간 회담을 제의하는 한편, 당면한 개성공단 해결을 위한 실무회담도 함께 제안할 것”을 촉구했다.

30일 현재 개성공단에 남아있는 7명이 대화의 물꼬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양무진 북한대 교수는 “잔류 인원은 인질이 아닌, 개성공단 재가동 메신저 역할을 할 것”이라며 “북한이 임금, 체납 세금 지불을 요구하는데 이는 물리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우리 역시 북한에 요구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논의하다보면 다시 대화의 여지를 갖게 되며, 역으로 볼 때 양측 모두 대화의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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