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만난 엔스퍼트 이창석 대표는 기자에게 지하철로 이동하자고 말했다. “3년 전만 하더라도 수백억 원 매출을 올리면서 중소벤처기업 대표로 청와대를 드나들던” 업체 대표는 택시비 4300원이 없었다. 백여 명이 넘는 직원이 있었던 엔스퍼트는 이제 대여섯 명의 직원만 남았다. 20평 남짓 다른 업체 사무실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엔스퍼트는 인터넷전화(VoIP·Voice Over Internet Protocol)로만 수백억 원의 매출을 올리던 업계 수위 업체였다. “그러나 KT를 만난 뒤 이렇게 됐다.” 이창석 대표와 KT는 3년째 책임 공방을 벌이고 있다.

엔스퍼트와 KT의 공방은 계약 변경 탓이다. 엔스퍼트는 2011년 말 KT를 공정거래위원회에 공정거래법 및 하도급법 위반으로 신고했다. 엔스퍼트는 KT가 태블릿PC 시장을 잘못 전망해 수백억 원의 피해를 고스란히 엔스퍼트에 전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KT는 품질 때문에 제품을 구매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계약을 무효화했다는 입장이다. 공정위는 1차 신고에서 KT의 손을 들어줬지만 엔스퍼트는 즉각 재신고했다. 공정위 재심 결과는 4월께 나올 것으로 보인다.

KT가 손 내밀어 만든 K패드

두 업체의 악연은 국내 최초 태블릿PC K패드(E201)가 나오던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KT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두 업체는 2010년 2월 ‘Android SoIP 전략 단말(S200)’에 대한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KT는 전화기에 오픈OS에 장착하고, 여기에 패드를 더한 차세대 인터넷 전화기(SoIP·Service Over Internet Protocol)을 성장 모델 중 하나로 추진했다. KT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멀티미디어형 전화기 서비스를 처음 시작한 게 S200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2010년 7월 SKT가 삼성전자 갤럭시탭 출시를 발표하자, KT는 엔스퍼트에 S200에 포함된 패드를 떼어 내 태블릿PC로 개발해 달라고 요청했다. K패드는 두 달 만에 탄생했다. 당시 KT는 엔스퍼트와 TFT를 구성하고 여기에 14명을 참여시켰다. KT 관계자에 따르면, KT는 7월 연구소 인력을 30명까지 투입했다. 안드로이드OS 버그 등이 감지됐지만 KT는 서둘러 K패드를 시장에 내놨다. 이창석 대표는 “아이패드가 들어오기 전 삼성과 SKT가 태블릿PC 시장을 선점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KT는 태블릿PC를 세컨드 디바이스로 접근했다. 태블릿PC는 음성통화를 대체하는 기본 단말기가 아니라 N스크린 멀티미디어 기기라는 것. KT는 2010년 8월 30일 서울 광화문사옥 6층 글로벌사업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K패드를 소개하면서 이 같은 전략을 공개했다. 당시 김성철 컨버전스와이브로사업본부(CW본부) 상무는 K패드와 갤럭시탭·아이패드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와이브로(WiBro)와 올레와이파이(Wifi)망을 이용한 K패드로 중저가 태블릿PC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것이 KT의 전략이었다.

   
▲ 김성철 상무는 2010년 8월 K패드 출시 계획을 밝힌 자리에서 태블릿PC를 세컨드 디바이스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N스크린 글로벌 시장 상품으로 공략할 것을 밝혔다. 셀룰러온라인 동영상 갈무리.
 
KT는 중저가 K패드와 고급형 아이패드로 시장을 공략하려고 했다. 엔스퍼트 이창석 대표가 제시한 ‘아이덴티티 탭 출시 기자간담회 예상 Q&A’를 보면 KT는 “태블릿PC의 경우, 국내 처음 판매되는 것이라 쉽게 예상할 수는 없으나, 연말까지 10만 대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고 내다봤다. 두 업체는 그해 9월 13일 17만대에 대한 매매를 추가로 계약했다. 두 업체는 S200으로 제품 변경이 가능한 내용으로 계약을 맺었다. 총 510억 원(K패드 17만대×(부가세 별도)대당 30만 원)에 달했다. 그해 12월 KT는 S200에 대한 개발검수를 완료하고 개발비 잔금을 치렀다.

계약했으나 납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7만대 계약은 진행되지 않았다. 2011년 1월 KT는 품질 문제를 거론하며 수취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계약은 그해 3월 123억 900만 원(부가세 포함) 규모로 바뀌었다. 두 업체는 나흘 차이로 두 개의 문서를 작성했다. S200과 K패드 관련 계약을 3개월 연장해 그해 6월까지 미루는 합의서(3월 4일자)와 2010년 9월 계약을 무효화하는 계약(3월 8일자)이다. KT는 대신 K패드 후속모델 E301(아이덴티티 크론)을 2만대를 구입하기로 했다. 내용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합의와 계약이 같은 달에 이루어진 것.

엔스퍼트는 “KT가 태블릿PC 시장 수요를 과도하게 예측했고, 아이패드와 별도로 K패드를 저가 제품으로 판매하려는 판매전략이 실패해 수백억 원대 손실이 발생하게 될 상황에 이르자 ‘발주 자체’를 무효화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창석 대표에 따르면, 엔스퍼트는 S200 2만대, K패드 3만대, E301 2만대 가량을 KT에 납품했다.

이창석 대표는 “KT 구매담당 실무임원이 ‘문책을 당하고 옷을 벗을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무효화 계약을 맺자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어 “그러나 KT가 ‘연장계약서를 써주면 문제가 안 되지 않느냐’는 말에 (무효화) 계약을 했다”면서 “매출 40%를 KT에 의존하던 모회사 인스프리트의 대표도 겸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KT 말을 안 들을 수 있었겠느냐. 그 말을 믿고 계약했다”고 말했다.

이창석 대표는 이어 무효화 계약에 대해 “400억 넘게 적자가 쌓인 회사가 2만대(약 123억 원) 판매해준다는 얘기에 동의할 리 있겠느냐”면서 “그건 업무상 배임이다. KT는 기간연장을 미끼로 우리를 기망했다. 무효화 계약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무임원 몇 명이 자신이 살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2011년 KT가 구매한 S200과 E301은 출시 기한이 늦어지면서 시장에서 외면을 받았다. 엔스퍼트는 △K패드의 경우, 2010년 말 KT가 아이패드를 들여온 뒤 찬밥신세가 됐고 △S200의 경우도, KT가 삼성이 만든 스마트홈패드(일명 이영애 패드)를 판매하면서 두 제품이 ‘사생아’가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엔스퍼트는 상장 폐지됐고, 80여 개의 협력업체들은 도산 위기를 맞았다고 이창석 대표는 전했다. 이창석 대표는 “K패드 완제품 8만 5000대 재고는 동남아 등 외국 중개상을 통해 일부 나갔고, 교육용 저가 단말기 시장에 판매했다. 현재 창고에 3000대가 있는데 압류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S200은 부품재고만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 2010년 KT가 엔스퍼트와 함께 출신한 K패드. 상품전문채널 미디어잇 유튜브채널에서 갈무리.
 
“KT는 책임질 일 없다”

두 건의 문서에 대해 엔스퍼트와 KT의 입장은 갈린다. 2010년 당시 CW본부 임원 A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K패드와 S200 품질이 형편없었고, 이창석 대표가 무리한 사업 확장의 실패를 KT에 떠넘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창석에게 속았다”고 말했다. 그는 “애초 S200이 주력이었는데 이창석이 부탁해서 계약을 그렇게 맺었지만 엔스퍼트가 제대로 된 물건을 내놓지 못했다”고 말했다.

A씨는 이어 “품질로 합의했던 것이 하나도 안 됐다”고 말했다. 그는 “S200의 보이스 딜레이가 2010년 4~500㎳여서 사업본부에서 받을 수 없었고, K패드는 고객들로부터 집단 소송을 당하는 등 품질 문제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엔스퍼트는 개발검수가 이루어진 2012년 12월 이후 10개월 뒤인2011년 9월에야 상용화 검수를 통과하고 시장에 나왔다.

그는 “엔스퍼트가 프로요가 나온 상황에서 이클레어 제품을 내놨는데 팔리겠느냐”면서 “IT제품은 타이밍이 중요한데 이창석이 계속 ‘한 달이면 된다’는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KT가 태블릿PC 시장을 두 트랙으로 접근한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아이패드가 나오면 (K패드 수요는) 죽는다고 봤다”면서도 “투 트랙으로 접근한 것은 맞다”고 말했다.

그는 KT 탓에 수백억 원대의 손실을 봤다는 엔스퍼트의 주장에 대해 “KT가 200억 원 넘게 사줬는데 손해 봤다?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KT가) 어떤 면에서 보면 굉장히 많이 (엔스퍼트를) 도와줬다”면서 ‘KT가 책임질 부분은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없다”고 덧붙였다.

   
▲ 엔스퍼트가 2010년 개발한 S200. 이 제품은 KT에서 2011년 9월 상용화됐다. KT 관계자는 보이스 딜레이 문제를 해결하고, OS 버그 등을 거론하면서 "엔스퍼트가 제때 제대로 된 제품을 내놓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창석 대표는 "KT가 제품을 구매하지 않으려고 기능을 추가로 요구하면서 시간을 끌었다"고 반박했다.
 

KT에 책임 있다? 없다?

S200과 K패드를 둘러싼 ‘계약→변경→무효화’ 과정을 두고 KT 내부에서도 이견이 제기된다. 계약부서에 일한 경험이 있는 KT 현직 직원은 “KT는 납품을 타진하는 사업부와 계약을 맺는 계약부서가 엄격하게 나눠져 있고, 자체 규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어떤 계약도 하지 못하게 돼 있다”면서 “계약을 체결하면 소진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KT가 제때 제품 규격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KT에 귀책사유가 있다”고 말했다. 계약을 맺었다면 합당한 근거가 있는데 이를 ‘갑’의 지위에서 무효화했고, 제품 출시를 위해 공동으로 해야 할 노력을 KT가 다했는지 의문이라는 것.

엔스퍼트의 법적 대리인인 법무법인 푸르메 김태연 변호사는 “KT가 엔스퍼트를 통해 K패드를 출시했다가 애플 아이패드 출시로 인해 사업성이 없어지자 교묘하게 무효화 계약을 체결해 기술개발을 실시한 엔스퍼트를 비롯한 하도급 중소기업체들을 줄도산하게 만든 사건”이라며 “KT가 하도급업체에게 책임을 떠넘겨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고, 하도급공정화에 관한 법률과 공정거래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0년 7월 12일 이석채 회장은 KT로 인한 중소기업 자원 낭비 없애기, 아이디어 가로채지 않기, 중소기업 업종과 경쟁하는 환경 조성하지 않기 등 ‘3불 정책’을 내놨다. KT의 계약 변경 및 무효화는 이 같은 정책에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KT 김철기 언론홍보팀장은 “어차피 공정위에서 문제가 없다고 판단을 했던 사안이고, KT는 협력업체를 지원하게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KT 손 들어준 공정위, 이번에는?

한편 엔스퍼트가 2011년 11월 16일 공정거래위원회에 KT를 불공정하도급거래행위로 신고한 결과, 공정위는 KT의 손을 들어줬다. 공정위는 지난해 5월 ‘17만대 매매계약 무효화 합의행위의 강제성’에 대해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입증자료를 제출하지 못했음”이라며 심의절차를 종료했다. 공정위는 “K-PAD 단말기 17만대 매매계약을 신고인(엔스퍼트)의 귀책사유가 없음에도 피조사인이 부당하게 합의에 의한 방식을 가장해 임의로 취소했는지 사실 확인이 어렵다고 판단돼, 심의 절차를 종료”한다고 밝혔다. 

엔스퍼트는 지난해 6월 공정위에 KT를 재신고했다. 현재 관련 조사 및 심사가 진행 중이다. KT는 공정위에 무효화 계약 당시 녹취록을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는 오는 4월 중 나올 예정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조사 중인 사안의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태연 변호사는 “재심에서 지더라도 민형사상 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2010년 12월 K패드 광고.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