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52년 진보당을 만든 죽산 조봉암이 2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 11.4%를 득표한 이후 국내 진보정치세력은 군부독재와 경제발전에 밀려 좀처럼 성장을 하지 못했다. 이후 1987년 13대 대선 당시 민중진영에서 백기완 후보가 출마했지만 중도 사퇴했고, 14대 선거에서도 백기완 후보가 나섰지만 1% 득표에 그쳤다.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본격화된 이후인 15대 대선에서도 국민승리21의 권영길 후보가 진보진영 후보로 나서 1.2%를 얻는데 그쳤다. 이후 민주노동당이 2000년 창당한 이후 진보정치세력은 나날이 확장돼 왔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는 3.93%를 득표했고, 2004년에는 10석을 얻어 국회에 첫 진출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2007년 자주파와 평등파가 나뉘어 갈등을 빚기 시작하면서 권영길 후보는 역대 사표심리가 가장 작용하지 않았던 그해 17대 대선에서 3%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함께 출마한 한국사회당 금민 후보도 0.07% 득표에 그쳤다. 2008년 총선에선 민주노동당 의석이 반 토막 났고, 민주노동당에서 분당한 진보신당은 1석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동안 진보진영이 겪었던 어려움은 이번 대선에서 겪는 어려움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할 정도다. 이번 대선에는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 노동자 후보인 김소연 후보, 김순자 후보 등 진보진영에서만 4명의 후보가 출마했고, 지지율을 합쳐봐야 1%를 밑돈다.

▷단일화에 잡아먹히는 진보 = 이번 대선을 지배하는 프레임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안철수 무소속 후보 간 단일화다. 양 후보 간 단일화에 모든 언론의 관심이 쏠려 있는 가운데 제3후보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2002년 대선에서는 권영길 후보가 이회창, 노무현 후보와 함께 나와 관심을 끌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대선은 아예 조명도 못 받는 최악의 시련기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진보정의당과 통합진보당은 이미 야권후보단일화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다른 정치적 활로를 찾기도 어렵다.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선거를 함께 치러서 정권교체에 서로 이바지하는 차원에서 참여할 생각”이라고 말했고, 이정희 후보는 13일 대전 선대위 발족식에서 “대선까지 남은 기간 동안 정권 교체와 야권 승리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라고 야권단일화 동참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들의 참여의지와 실제 영향력은 아무 관련이 없다. 리얼미터에서 11월 20일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지지율은 0.6%, 심상정 진보정의당 후보는 0.2%정도다. 물론 단일화 이후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의 경쟁에서 수십만표로도 야권의 당락이 갈릴 수 있지만, 진보진영에 대한 여론 자체가 너무 좋지 않아 ‘플러스’가 될지도 불분명하다.

문재인·안철수 후보 간 단일화가 이루어져 여기에 합류한다고 해도, 그 시기와 방법은 문제다. ‘진보적 정권교체’를 내세우고 있는 이들 두 정당이 공동정부 내지는 공동공약 등의 ‘성과’ 없이 무작정 사퇴하기도 민망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쉽게 단일후보를 지지하고 물러서기도 어렵다는 것이 양 당 관계자들의 고민이다.

특히 25~26일 대선후보등록기간을 앞두고 진보정의당의 경우 아직 명확한 입장정리를 하지 못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진보정의당의 한 관계자는 “아직 후보등록 전 사퇴를 할지, 후보등록 이후 사퇴를 할지 내부 방침이 정해져 있지 않는 상황”이라며 “아직 우리의 정책을 알리거나 차별화를 시키지도 못했는데 여러 가지로 고민된다”고 토로했다.

통합진보당의 경우 일단 대선후보등록은 하겠다는 입장이다. 통합진보당의 한 관계자는 “후보등록은 할 것”이라며 “등록하는 날 기자간담회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보대표’ 경쟁 치열 = 양 당의 고민은 진보정당의 대표성 획득에도 맞춰져 있다. 복수 진보정당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각 진보진영은 진보의 대표성 획득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진보정당의 정책 차이가 대북관 정도를 제외하면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진보정당에서 돋보이는 차별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거가 중요하다.

2008년 분당 이후 노회찬·심상정 등 대중정치인이 진보신당으로 이동했지만, 정작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앞선 이후 진보진영의 대표성은 사실상 민주노동당이 가져갔다. 이후 통합진보당이 선거에서 13석을 얻으면서 통합진보당에 대표성이 부여됐지만, 분당 이후 양 측은 ‘진보진영 대표선수’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부심해왔다.

때문에 양 측은 결별 후에도 여전히 통합진보당 경선 부정 사태를 놓고 치열한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지난 14일 대구에 방문한 심상정 후보는 “국민들이 올해 통합진보당 사태로 진보정치에 대해 매우 화가 나 있는 것을 느꼈다”며 “지난 총선 당시 통합진보당이 220만 표를 얻어 제3정당, 대안정당으로 자리 잡았는데 국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정희 후보도 같은 날 대구 기자회견에서 “부정을 조직적으로 주도한 오옥만, 이영희 후보와 오옥만 캠프의 고영삼 씨가 구속됐다”며 “이것이 사태의 전말”이라고 말했다. 사태의 책임을 진보정의당 쪽에 돌린 셈이다.

대선에서도 이런 고민들이 이어진다. 진보정의당의 한 관계자는 “심상정 후보가 후보등록기간 전 사퇴하고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가 계속 간다면, 단순하게 TV토론만 따져봐도 박근혜-단일후보-이정희 후보 형태의 모양이 된다”며 “진보진영의 대표성을 이정희 후보가 획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연·김순자는 왜 따로 나섰을까 = 현재 진보진영에는 심상정·이정희 후보 외에도 김소연 전 기륭전자 분회장, 김순자 연대노조 울산과학대 지부장도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 김소연 후보는 민주노총 일각에서 노동자 후보로 추대했으며, 김순자 후보는 진보신당 일각에서 후보로 추대했다.

진보신당은 지난 1일 대표단 회의를 통해 “18대 대선에서 민주연립정부에 반대하고 독자완주를 위해 노력하는 진보좌파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방침을 결정한 바 있는데, 김순자 후보는 이에 “당에서 대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번 대선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변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고 불복했다. 이 과정에서 당 대선후보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회당 출신 안효상 진보신당 공동대표도 사퇴한 바 있다.

민주노총 일각과 진보신당에서는 심상정·이정희 후보가 독자완주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민주연립정부 반대와 대선 완주할 노동자 후보를 출마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소연·김순자 후보의 동시 출마는 민중진보좌파진영 내부조차도 대선 후보에 대한 조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김소연 후보에 대한 지지를 결정한 진보신당의 한 관계자는 “우리로서는 김소연 후보와 김순자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각 후보 선본끼리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지만 (두 후보 간 단일화가)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신당 김종철 대표권한대행은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결정적으로는 진보세력이 나눠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안타깝다”며 “진보신당이나 좌파진영 쪽에서 커뮤니케이션 안돼서 두 분이 함께 출마한 것에 대해서는 국민들께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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