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강이나 바다 가운데 떠있는 땅. 주위를 둘러싼 물은 계속 흘러가는데 그 흐름을 타고 같이 휩쓸려가지 못하고 한 자리에 붙박이로 남아있는 곳. 흔히들 사람은 누구나 각자가 외로운 섬이라고 한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기획 프로그램 ‘그 해 여름’에서 여름이라는 이정표로 엮은 영화들 가운데 6월 26일과 30일 두 차례 상영되는 <김씨 표류기>(감독 이해준)는 도시 가운데 있는 지리로서의 섬과 사람 가운데 고립된 존재로서의 섬을 엮어낸다. 서울 한가운데 섬이 있다. 한때는 고립된 지리적 특성을 살려 귀양지로 이용되기도 했고, 한때는 사람들이 뽕나무 심고 누에치며 나름 부를 일구는 곳이기도 했던 그 섬은 근대화를 겪으며 새로운 도시 꼴을 갖추는 과정에서 깎여 나가고 점점 작아지면서 어느덧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여의도 바로 옆, 서강대교 아래 새들이 노니는 밤섬이 그 섬이다.
문명사회에서 떨어져나가 갑자기 야생의 삶을 살아야하는 로빈슨 크루소와는 달리, <김씨표류기>는 자본주의 하이 테크놀로지 시대에 그 첨단의 잉여, 쓰레기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그린다. 남자 김씨가 섬에 흘러들어와 쌓인 이런저런 폐품들을 활용해 무한도전식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동안, 여자 김씨는 버추얼 리얼리티 사이버 아이덴티티 구축에서 익힌 클릭 솜씨를 발휘해 인터넷 쇼핑으로 소통에 필요한 장비와 소품을 갖춘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상황이니 섬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연이나 천재지변이 아니라 말을 건넬 수 있는 용기, 손을 내밀 수 있는 배려다. 그 용기와 배려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 눈이 마주쳐야 한다. 두 김씨 남녀가 눈을 마주치고, 말을 건네고, 손을 잡게 하는 과정은 세상과 떨어져있다. <김씨 표류기>는 영화니까 영화의 첫 번째 전제, 시선을 통해 둘을 이어준다.
시선이 관음증에서 그치지 않게 하려면 행동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행동은 그 실행에 따른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는 또 다른 관계와 실행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해준 감독은 그저 바라만 볼 것인가, 실행할 것인가 사이에서의 머뭇거림의 시간을 오래 지켜본다. 이건 영화니까, 영화가 할 수 있는 것, 보여주는 데까지 보여주는 것으로 그친다.
섬을 벗어났을 때, 또는 섬이기를 그만두기로 했을 때 세상의 흐름에 어떻게 휩쓸리게 될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김씨 표류기>는 참 우스운 순간도 많고, 기발한 대사도 많지만 마음 편히 웃을 수 있는 코미디가 되기에는 버겁다.
관객의 입장에서 김씨 남녀를 그저 관람의 대상으로 지켜볼 수 있다면 킬킬대며 기발한 대사와 절묘한 연기를 즐길 수 있겠지만 그러자니 영화가 출발하는 문제의 지점에서 벗어나게 되고, 김씨 남녀의 안타까운 상황에 공감하고 동일시를 하게 되면 그 상황이 웃음보다 절절한 고통을 만들어 낼뿐더러 애초에 그들을 섬에서 표류하게 만든 문제 자체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무거움을 떨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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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방문을 닫아걸고 말문을 열지 않던 여자 김씨가 먼저 바라보고 먼저 인사 건넬 힘을 냈을 때,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때, 그만큼 용감해지고 소통할 자신이 생긴 그녀는 더 이상 외따로 떨어져있는 섬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여기까지. 나머지는 각자 세상과 겪어야할 몫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할 수 있어야 가능한 짐이니 주위를 따뜻한 시선으로 돌아보기를. 짜장면이 마침내 표준말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되돌아보고, 그러니 김씨도 여자 김씨도 당당하게 서로의 이름으로 만나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