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만 이기면 다 해결된다”는 정서가 파업 현장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야권 연대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면 낙하산 사장을 끌어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제도적 변화들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한 지금 돌아보면 정치적 해법에 지나치게 큰 기대를 걸었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도 나온다. 사실 한국 언론이 겪고 있는 문제는 단순히 다수결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낙하산이었다. 김인규 KBS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낙하산이다.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공영방송 사장의 임기를 보장하기 위해 대통령의 임면권을 임명권으로 개정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정연주 전 사장에게 배임 혐의를 뒤집어 씌워 강제로 끌어내렸다. 정 전 사장은 대법원까지 가서 혐의를 벗긴 했지만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정연주 사장의 강제 해임은 제도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사회 구조를 바꾼다고 낙하산 사장을 막을 수 있을까. 야당 추천 이사를 늘리거나 여야 동수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3분의 2 이상이 동의를 하도록 하면 달라질까. 방송사 파업이 100일 가까이 계속되면서 출구전략을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명확한 해법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4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파업을 접고 복귀하는 시점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개혁·진보 진영의 총선 패배가 공영방송을 낙하산 사장 체제에 방치한 데서 비롯했다고 보고 있다. 최 교수는 “이런 상황이라면 최악의 경우 대선까지 방송 뉴스 없이 치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들어가서 싸우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난 총선의 경험을 돌아보자. 소셜 네트워크에서는 이명박 정권 심판의 목소리가 드높았지만 상당수 국민들은 대안 없이 반MB를 외치는 야당에 싫증을 냈다. 여전히 상당수 국민들은 지상파 방송으로 뉴스를 보고 정치적 판단을 내린다. 최 교수는 “총선만 이기면 된다는 전략에 문제가 없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처럼 방송을 포기한 상태에서는 다음 대선도 결코 장담할 수 없다는 게 최 교수의 주장이다.

최 교수는 “설령 총선에 이기더라도 임기가 보장돼 있는 공영방송 사장을 끌어내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번 파업의 가장 큰 성과는 언론은 망가졌지만 언론인들은 망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라면서 “리셋 뉴스9와 제대로 뉴스데스크를 만드는 정신이면 들어가서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공정보도에 대한 열망이 아직 살아있는 지금이 기회라는 이야기다.

최 교수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사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에 우려를 드러냈다. “여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한 상황에서 박 위원장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잘 싸워놓고 왜 공을 다 넘겨주려하느냐”는 이야기다. 최 교수는 “박근혜에게 빚을 지면 대선 국면에서 박근혜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면서 “정치권에 의존하지 말고 노동조합이 독자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파업이 장기화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사장 퇴진이라는 이슈에만 매달릴 경우 공정보도 쟁취라는 더 큰 목표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투쟁 동력만 살아있다면 들어가서도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면서 “공정보도를 쟁취하는 동시에 낙하산 사장을 막을 수 있는 제도 개선 투쟁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 교수는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원칙이 정치적 생명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기업을 경영하며 언론을 관리 대상으로 생각해 왔던 이명박 대통령의 철학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대통령이 공영방송의 사장을 임명하는 시스템에서는 의결 구조를 어떻게 바꾸더라도 정치권력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 “결국 대통령의 철학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MBC 사장은 70% 지분을 가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회에서 결정되는데 방문진 이사회는 정부와 여당이 6명을 선임하고 나머지 3명을 야당에서 선임한다. KBS 사장은 이사회에서 선임되는데 11명의 이사 가운데 6~7명을 정부와 여당이 선임한다. 태생적으로 청와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다. 낙하산 사장을 막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사회적 압박과 감시다. 이번 투쟁을 어떻게 성공으로 이끄느냐가 중요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정부·여당과 야당, 시청자를 포함한 시민사회진영이 동일하게 이사회에 참석하는 방법도 있고 노동조합에 거부권(비토권)을 주는 방법도 있다. 사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해 투명하고 공정한 선임 절차를 확보하는 것도 방법이다. 최 교수는 제도 개선이 만능의 해법은 아니라는 전제 아래 “누가 선임할 권리를 갖느냐도 중요하지만 적절하게 비토권이 주어질 때 오히려 생산적인 토론과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공영방송에 공적 책임이 요구되는 건 단순히 공공재인 지상파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방송사들의 주인이 국민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최근 콘텐츠 플랫폼이 다변화하면서 지상파 방송사들이 미디어 기업처럼 행동하는 경향을 보이는 건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라면서 "공적 소유의 개념을 다시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방송의 공공성 회복을 목표로 두고 다음 전략을 고민하자”는 이야기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