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나갈 때는 모녀가 걸어서 떳떳하게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7일 저녁 6시 서울 중랑구 원진직업병관리재단 녹색병원.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한 뒤 뇌종양에 걸려 투병 중인 한혜경(35)씨를 응원하러 온 시민들에게 혜경씨의 어머니 김시녀씨는 감사의 뜻을 전했다. 혜경씨와 함께 투병 중인 환자들과 외부에서 후원하러 온 시민들 200여 명이 병원 1층~2층 로비를 빼곡하게 메웠다.

혜경씨도 휠체어에서 내려 병원 로비에 간이로 만든 무대 위에 어머니와 함께 섰다. 딸의 모습을 본 어머니는 “이제는 못 하는 게 없네”라고 말했다. 모녀 뒤쪽에 걸린 펼침막에는 녹색병원, 일과건강,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주최한 ‘삼성 직업병 피해자 한혜경 후원 음악회-엄마, 더 행복해질게요’라고 쓰여져 있었다. 모처럼 모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음악회 1부는 ‘한혜경 이야기’라는 주제로 그동안의 투병 사연과 현재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진행 중인 산재 소송 등의 이야기가 다뤄졌다. ‘봄눈별’의 인디언 플롯이 마음을 치유하는 음악으로 이야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만큼 이들 모녀는 그동안 병마와의 싸움과 사회적 ‘장벽’과의 투쟁이 쉽지 않았다. 김시녀는 이날 공개된 영상을 통해 “집안이 어려워 혜경이가 고3 때부터 일하기 시작했다”며 “기흥공장에 들어갔는데 ‘바보 인생’이 돼버렸다”고 토로했다.

반올림에 따르면, 지난 1995년 10월 혜경씨는 삼성전자 기흥공장의 생산직으로 입사했다. 혜경씨는 6년 동안 LCD 모듈과에서 인쇄회로기판의 납땜을 하는 업무를 맡았다. 주야 교대 근무로 하루에 8~12시간까지 일했는데, 건강하던 혜경씨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입사한 지 3년이 지나자 생리가 완전히 없어졌고 2001년 8월에 일을 그만뒀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다 2005년 10월 의식을 잃고 쓰러져서야 모에 뇌종양을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수술을 받았지만 시력, 보행, 언어 장애가 생겨 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당시 혜경씨 나이는 28살이었다.

건강했던 혜경씨가 불과 몇 년 사이에 장애를 겪게 된 것을 혜경씨 모녀는 ‘산업재해’라고 판단하고 있다. 혜경씨는 반도체 공장에서 납, 플럭스, 유기 용제 등 당시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유해 물질을 보호구도 없이 다뤄 왔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쪽에서는 안전 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이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혜경씨는 당시 근무 환경을 전했다.

그 뒤로 2009년 혜경씨는 근로복지공단 평택지사에 산재 신청, 노동부에 심사청구를 했지만 모두 불승인을 당했다. 지난 4월부터 혜경씨는 서울행정법원에 “근로복지공단의 산재보험 부지급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소송을 대리 중인 조지훈 변호사(법무법인 다산)는 “피고가 근로복지공단인데 소송 보조참가자로 삼성전자가 참여한다”며 “사실상 삼성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대리인으로는 로펌인 율촌이 참여했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처럼 사실상 삼성을 상대로 한 모녀의 싸움은 쉽지 않은 것이다. 혜경씨는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산재를 수용할 것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면서 “화가 난다”고 말했다. 음악회에서 이 영상을 본 시민들은 혜경씨의 이런 외침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않는 대기업의 현실을 조용히 목격했다. 

그럼에도 혜경씨는 굴하지 않았고, 용기를 냈다고 한다. 작년 6월에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고 황유미, 고 이숙영씨의 유족이 행정소송에서 이긴 것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삼성쪽에서 ‘돈을 줄테니 소송을 취하하고 반올림 등 시민단체와 함께 활동을 하지 말 것’을 제안 받았지만, 어머니 김시녀씨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으면 당장의 궁핍함은 면할 수 있지만 그 다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돈을 받고 고립되는 것보다는 생계가 어려워도 연대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이었다.

그 결과 현재 모녀는 고통 속에서 단절됐던 과거에서 벗어나 점점 세상과 만나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녹색병원(원장 양길승)에서 무료로 혜경씨의 재활 치료에 나선 것도 모녀가 힘을 얻게 된 원동력이 됐다. 음악회 2부 주제를 ‘희망! 더 행복해지기’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직장인으로 구성된 참여연대 회원 노래패 ‘참좋다’는 직장 일이 끝나자마자 서울 곳곳에서 바쁘게 달려왔다. ‘릴라와 친구들’도 우쿨렐레에 입문한지 10개월밖에 안 됐지만, 혜경씨 모녀의 힘을 보태기 위해 ‘맹연습’을 하고 음악회를 찾앗다. ‘노동자를 위한 가수’인 박준씨는 노래 ‘행복의 나라로’(한대수)를 불렀고, 김호철씨는 트럼펫을 경쾌하게 연주했다.

민족시인 이적씨는 “겨울 들녘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꽃송이”라며 “거대한 태풍 같은 회오리 바람이 쓸고 간 들녘 아직 은 넘어 질 수 없어 넝쿨으로라도 살아올라 비틀어진 세상의 줄기가 되리라고 다짐도 하고”라며 ‘꽃 한송이-한혜경씨에게’라는 시를 선물했다.

주요 언론이 이들의 투쟁을 알리지 않았지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뉴미디어와 책을 통해서 이들의 삶을 전하기도 했다. 최근 팟캐스트<나는 무방비다>에서 한혜경씨의 사연을 전했다. 또 ‘삼성 백혈병’ 관련 황상기·정애정씨의 사연을 담은 <사람냄새>·<먼지 없는 방>(보리출판사)을 펴낸 김수박·김성희 작가들도 이날 음악회에 참여했다. 

한혜경씨 모녀는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응원하는 시민들에게 ‘더 행복해지자’고 화답했다. 어머니 김시녀씨는 “우리한테는 또 다른 희망이 보인단다”라며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어도 우리와 함께 해줄 수 있는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많지 않니”라고 말했다. 김시녀씨는 또 “(혜경이는)이미 엄마한테 돈보다 중요한 걸 해줬다”며 “돈 주고도 살수 없는 사람들을 알게 해준 게 엄마 딸 혜경”라고 말했다.

김시녀씨는 “이제 우리 딸이 빨리 걸어서 친구와 함께 추억도 만들고 하고 싶은 일도 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거야”라며 “열심히 재활 치료를 받아서 우리를 도와준 모든 사람들에게 걸어서 보답하자”라고 말했다.

한혜경씨도 “조금만 기다리세요. 엄마”라며 “사랑해요. 많이 사랑해요”라고 화답했다. 혜경씨 모녀와 함께 참석자들은 ‘장미’라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이날 후원회를 마무리했다. “당신에게선 꽃내음이 나네요. 잠 못 이룬 나를 깨우고 가네요. 어여쁜 꽃송이 가슴에 꽂으면 동화 속 왕자가 부럽지 않아요”라는 흥겨운 음악이 녹색 병원의 밤을 아름답게 메웠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