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한푼도 못주겠다’라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발언 기사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대목을 삭제한 것에 대해 내부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05년 11월 입사한 공채 16기 기자들부터 지난해 7월 입사한 21기 기자 39명은 19일 오후 연서명을 통해 ‘무뎌진 상식의 선이 회복되길 바랍니다’라는 성명을 내어 문제가 된 기사의 경제부장의 해명과 편집국장의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기자들은 성명에서 “데스크는 현장 기자와의 동의 없이 기사의 일부를 삭제했고, 마침 그 내용은 취재원(삼성)이 현장기자에게 이의를 제기한 부분”이라면서 현장 기자와 협의를 거치지 않은 데스킹 과정을 비판했다.
 
이들은 “삼성의 요구와 무관하게 경제부장 본인이 판단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더라도 이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이라며 “해당 기자는 해당 문장이 취재를 거쳐 필요한 내용이라고 판단했고, 취재원인 삼성의 요구에도 이를 고수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기자들은 “데스크와 현장 기자의 의견이 엇갈릴 때, 현장 기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채 기사가 수정되는 과정을 ‘데스크 권한’이라는 말로 쉽게 정리할 수는 없다”며 “한겨레의 많은 구성원들이 최근 진보언론에서 나온 사안뿐만 아니라 삼성-CJ 미행·소송 관련 기사의 보도방식과 과정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개탄했다.
 
기자들은 정남기 경제부장에게 ‘합리적 추론이 아니라 삭제했다’는 판단의 근거에 대해 묻고 박찬수 편집국장에게 입장표명을 요구했다.

다음은 성명 전문이다.

무뎌진 ‘상식의 선’이 회복되길 바랍니다.

4월18일치 오전, 편집국 경제부 기사집배신에 ‘삼성그룹에서 고맙답니다’란 글이 올라왔습니다. 내용인 즉, 이날치 한겨레 2면 톱기사 <이건희 “한푼도 못줘…대법원 아니라 헌재까지라도 갈 것”>의 5판 제작과정에서 “삼성물산·삼성전자 직원의 이재현 씨제이 회장 미행으로 사회적 비난이 이는 가운데 분위기 반전을 위해 이 회장이 직접 발언에 나섰다는 해석도 나온다. 삼성그룹이 미행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이는 상황에서 더는 밀릴 수 없다는 인식이 커졌다는 얘기다”는 부분이 기자와 협의 없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벌어진 과정에 대한 경제부장의 해명과 편집국장의 입장 표명을 요구합니다.

데스크는 현장 기자와의 동의없이 기사의 일부를 삭제했고, 마침 그 내용은 취재원이 현장기자에게 이의를 제기한 부분이었습니다. 문제의 취재원은 한겨레 최대 광고주 삼성입니다.

경제부장은 이에 대해 “삼성 쪽 연락을 받은 적 없다”며 “편집회의에서 지적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합리적인 추론이 아니라고 봤다. 그 정도는 데스크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고 적었습니다.

삼성의 요구와 무관하게 경제부장 본인이 판단해 그와 같은 결정을 내렸더라도 이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입니다. 해당 기자는 해당 문장이 취재를 거쳐 필요한 내용이라고 판단했고, 취재원인 삼성의 요구에도 이를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현장 기자의 판단과는 다르게 한겨레 경제부장이 판단한 근거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한겨레 경제부장의 판단은 한겨레신문의 판단이며 따라서 한겨레 구성원들의 동의와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경제부장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협의 없이 야간에 기사의 주요 내용이나 방향을 바꾼 사례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3월6일치 경제면 머리기사 <삼성가 소송 뒤엔 ‘이재용-이재현’ 후계 다툼> 때도 이재용에 대해 “2000년 손댔다가 실패한 e 삼성은 아직도 그의 꼬리표다” “3세 승계가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다”는 문장이 야간 데스킹과정에서 기사를 쓴 기자와 협의 없이 빠졌습니다. 당시 경제부장은 ‘의견 조율이 충분치 못했다’며 ‘현실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균형을 잡는 작업이 중요하다’ 등의 해명을 했습니다.

데스크와 현장 기자의 의견이 엇갈릴 때, 현장 기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채 기사가 수정되는 과정을 ‘데스크 권한’이라는 말로 쉽게 정리할 수는 없습니다. 한겨레 많은 구성원들이 최근 진보언론에서 나온 사안 뿐만 아니라 삼성-CJ 미행·소송 관련 기사의 보도방식과 과정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한겨레 사규’엔 “신문제작종사자는 편집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내용으로서, 양심에 반하는 취재 또는 제작지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편집위원회는 공식문서로 답변해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또한 한겨레신문 윤리강령엔 “우리는 사내의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이를 모아 신문제작과 회사의 운영에 반영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사태가 ‘사규’나 ‘윤리강령’을 들먹이지 않고 해결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가 ‘철모르는 순진한 외침’으로 전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해당 부서장의 상세한 해명을 요구합니다. 해당 기자의 문제제기 직후 글의 삭제를 요구해 더 많은 이들이 이번 사태를 공유하지 못하게 막은 이유는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이번 사태에 대한 의견은 어떠한지 편집국장의 입장 표명도 요청합니다.

2012년 4월 19일 한겨레 공채 16~21기
박수진 박수혁 박종식 박현정 박현철 임지선 전진식 최현준 하어영 김경욱 김명진 김외현 김지은 노현웅 박기용 송호균 신소영 이완 정유경 진명선 최원형 권오성 김성환 송경화 이정연 황춘화 김민경 송채경화 이경미 이승준 김지훈 박보미 박태우 엄지원 이유진 김선식 김효진 정환봉 최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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